베트남 국민간식, 반미
일이나 기타 여러 가지의 이유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마주했을 때 혹은 평소와 다른 환경에 놓여져 허한 마음이 들 때... 사람마다 그 문제를 다스리는 방법은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주로 '먹는 것'으로 푸는 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뭔가를 '씹어야' 잠이 깨고, 무료함이나 공허함을 달랠 때도 뭔가를 먹으면, 몸의 허기뿐만 아니라 마음의 허기도 채워진다. 또, 새로운 나라나 새로운 장소에 가면 그곳의 음식을 먹어봐야 한다. 그게 비싼 곳이든 편의점 음식이든,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관 없다. 결론은... 맛있는 것을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 덧붙여 내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 있다면, 새로운 음식에 대해 마음의 거부감도 신체의 거부감도 크게 없다는 것! 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가~~
그런 내가 이 곳에 살면서 '꽂힌 것'이 있다면, 바로 '반미(bánh mì)'다. 반미는 베트남어로 빵, 특히 바게트 빵을 말하는데 반미의 '반(bánh)'은 빵이나 반죽을, '미(mì)는 쌀가루를 뜻한다. 그래서 반세오(달걀이 들어간 반죽을 우리나라 부침개처럼 얇게 부친 후, 그 안에 채소나 새우 고기 등을 넣어 싸 먹는 것)나 반꾸온 처럼 '반'이 들어간 베트남 음식이 있다면, 그것은 빵이거나 반죽을 얇게 펼쳐 뭔가를 싸 먹는 것 혹은 수제비 반죽같은 것에 뭔가를 곁들여 먹는 음식이겠구나, 생각하면 된다. 여기에 '미'라는 글자가 있는 걸로 봐서 이 빵에 쌀이 들어간 것 같은데... 실제로 요즘은 빵을 만들 때 밀가루도 사용하지만, 예전엔 쌀가루로 만들었다고 한다.
베트남에 빵문화가 발달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의 영향이다. 베트남은 프랑스 지배를 받은 탓에 '빵 문화'가 굉장히 발달했는데 그중에서도 이 바게트 빵, '반미'가 유명하다. 베트남식 바게트는 일반 바게트에 비해 길이가 짧고 안은 굉장히 부드럽고 촉촉하지만 겉은 살짝 바삭하다. 한입 베어 물면 포슬포슬한 가루가 우수수 떨어질 정도.
베트남에선 원래 아침에 반미를 먹는다. 그냥 먹는 건 기본, 빵 안에 채소와 고기를 가득 넣어 샌드위치처럼 만들어 먹기도 하고, 스테이크에 곁들여 먹거나 수프에도 찍어먹는 등 아침, 점심, 저녁 늘 함께 한다. (길을 가다 보면 오토바이 뒤에 반미가 가득 찬 작은 투명 상자를 싣고 반미를 팔러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빵 자체가 반미인데, 보통 한국사람들이 말하는 '반미'는 빵과 함께 고기나 채소를 같이 먹는 음식을 말한다. 근데 이 맛이 정말 예술이다. 빵의 차이일까, 일반 바게트 샌드위치랑은 확실히 다르다.
우리 아파트엔 '카페 하일랜드' (베트남에서 스타벅스가 아성을 넘지 못한다는 바로 그 카페다)가 있는데, 요가가 끝난 후, 아이스커피 한 잔에 이 반미 하나 먹으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다. 가격도 정말 착한 한 개에 19.000 vnd. (우리나라 돈으로 천원이 안 된다) 정말 처음엔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듯, 이 앞을 그냥 가지 못할 정도로 '반미'에 푹 빠져 살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건네는 아침 인사가 반미 먹자였으니... 여기 와서 내가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해도 살이 빠지지 않는 이유, 베트남에서 와서 찐 내 뱃살의 50%는 다 요 녀석 때문이다.
도대체 이 반미는 어떻게 이렇게 베트남 국민간식이 된 것일까. 반미의 역사를 좀 찾아보았다.
19세기 선교를 목적으로 처음 베트남에 들어온 프랑스는 그 후,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게 되는데, 이때 자신들의 주식인 바게트를 함께 가지고 온다. 그러다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그간 빵을 만들기 위해 프랑스에서 들여왔던 밀 공급이 어려워지자 궁여지책으로 바게트를 베트남 현지에서 만들 방법을 찾는다. 그때 나온 방법이 밀가루와 쌀가루를 섞어 만들기로 한 것.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바게트를 비롯한 빵 문화가 발달한 프랑스는 바게트를 딱딱하게 만들 방법도,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방법도 알고 있었지만 베트남은 그런 노하우도 없었고 또 후텁지근한 날씨 탓에 오래 두고 먹을 수도 없었기에 자기들의 상황에 맞게 바로바로 먹을 수 있고 짧은 시간 소비가 가능한 오늘날의 베트남식 바게트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엔 이 반미 문화에 또 한차례 변화가 찾아왔다. 베트남 북부와 남부 사람들이 섞이면서 반미를 먹는 방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 북부에서 남부로 온 이주민들은 북부에서 자신들이 먹던 대로 다진 고기를 넣어 만든 북부식 반미를 팔았고, 남부에서 북부로 온 사람들은 기존에 북부 사람들이 먹던 방식대로 수프 같은 국물요리에 반미를 찍어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베트남 전역에 다양한 반미 요리가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반미는 이제 베트남 전역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프랑스와 미국으로 이주해 간 베트남 사람들이 자신들이 고향에서 먹던 반미를 프랑스와 미국으로 가져간 것인데, 원래부터 주식으로 빵을 먹던 사람들에게 간단하면서도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반미는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던 것이다.
요즘엔 한국에도 꽤 많은 반미 프랜차이즈 식당이 생겼는데, 아무래도 가격이 좀 비싸긴 했다.
반미는 보통 크게 두 가지 스타일로 나뉜다.
첫 번 짼, 주로 내가 즐겨먹는 '반미'처럼 가볍게 샌드위치식으로 즐기는 스타일이다.
우선 빵을 가른 후, 소스를 바르고 채소와 고기를 넣는다. 채소는 보통 소금과 식초물에 절인 당근과 오이, 고수가 기본으로 들어가는데 이와 함께 어떤 고기를 넣느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구운 돼지고기를 넣은 '반미 팃 느엉' (bánh mì thịt nướng)
닭고기를 잘게 잘라 넣은 '반미 가 세' (bánh mì gà xé)
돼지고기 소시지를 구워 얇게 썰어 넣은 '반미 짜 루아 싸 씨우' (bánh mì chả lụa xá xíu)
돼지고기 미트볼을 넣은 '반미 씨우 마이' (bánh mì xíu mại )
참치 (통조림용 참치일 듯)를 넣은 '반미 까 응으 ' (bánh mì cá ngừ)
이 중 내가 가장 즐겨먹는 건 반미 가세, 치킨 반미다.
두번짼, 작정하고 한 끼 때우기 위해 먹는 '반미'도 있다.
우리 남편이 회사 동료들과 자주 가는 곳이라며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이 그런 곳 중 하나. '이 곳이 진정 반미 맛집'이라며 데리고 간 식당의 이름은 '반미 후에'. 이 곳뿐 아니라 이런 스타일로 나오는 반미식당은 많다.
뜨겁게 달궈진 돌솥 팬에 덮여져 있던 뚜껑을 열면 지글지글 끓는 버터기름 위에 삼겹살 스타일의 고기와 미트볼, 튀긴 감자, 쪽파, 달걀 등이 올려져 있고, 여기에 빵이 함께 나오는데 이 집 빵은 내가 먹어본 반미 중에 가장 맛있다. 저 빵을 조금씩 잘라, 고기와 채소를 얹어 싸 먹으며 식초와 설탕 소금에 살짝 절인 오이와 토마토를 곁들여 먹는다.
처음에는 '와~' 하면서 정말 맛있게 먹었는데 계속 먹다 보면 중간부터 약간의 느끼함이 올라온다. 맥주가 계속 들어간다는 게 함정. 맥주와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가 필수다. 포만감은 정말 저녁까지 계속 간다. ^^
(가격은 125.000 vnd, 우리나라 돈으로 6천 원 정도니 현지인들이 먹는 곳치곤 싸진 않다)
이외에도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 '반미 25', '반미킹', 'GREAT 반미'도 맛있다.
가볍게 먹고 싶다면 베트남 샌드위치 스타일의 반미를, 한 끼 든든히 채우고 싶다면 스테이크 스타일의 반미를... 어떤 것을 먹어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