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의 공포, 그리고 군고구마의 온도

이 와중에 배가 고프다니

by 마가렛꽃

죽고 싶다는 생각과 배가 고린다는 본능이 한 그릇의 컵라면 안에서 기괴하게 뒤섞였다.


'제5진료실 안선우'. 스마트폰 화면 속 그 이름 석 자를 확인한 순간 내 세상은 채도를 잃었는데, 위장은 눈치도 없이 요동쳤다. 빨간 국물을 들이키며 나는 스스로를 경멸했다. 영혼이 난도질당한 와중에 고작 밀가루 가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다니. 인간이란 이토록 비참하고도 뻔뻔하게 설계된 존재인가.


빨간 국물이 흰 플라스틱용기를 붉게 물들였고, 밑바닥의 건더기 수프의 가루를 두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허기는 더 이상 신체만의 허기가 아니다.


거짓 신호라는 걸 알지만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가슴뼈 아래쪽, 명치 부근이 블랙홀처럼 뻥 뚫린 기분이었다. 무언가 더 집어넣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생명의 불꽃이 꺼질 것 같은 원초적인 공포가 밀려왔다. 결국 약을 입에 털어 넣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천장을 보며 다짐했다. 그 시절은 절대 떠올리지 않겠다고. 사실 그는 나를 때린 적이 없다. 중학교 때까지 유도를 했던 내 덩치를 그들도 의식했을 것이다. 나는 매일 밤 주먹을 피가 나도록 맞대며 기도했다. 제발, 너희 중 누구라도 나를 먼저 한 대만 때려달라고. 정당방위라는 이름으로 너희를 합법적으로 짓뭉개버릴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만 나는 끝내 누구도 때리지 못했다. 할머니는 내가 힘이 세서 남을 아프게 할까 봐 참는 '귀한 아이'라고 하셨지만, 사실 겁쟁이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괴물이 될까 봐, 내가 그와 똑같은 인간이 될까 봐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채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뎠다. 그리고 그 지옥의 파편은 십 년이 지난 지금,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내 숨통을 조여 온다.


"할머니..."


어둠 속에서 입 밖으로 낸 이름은 주문이 되어 나를 일으켰다. 그래, 지금 당장 무너져 내리더라도 할머니 얼굴은 보고 와야지. 그녀는 내 유일한 평온이자, 내가 다시 인간으로 살고 싶게 만드는 마지막 닻이었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옷을 챙겨 입었다. 거울 속 마스크를 쓴 남자는 초라했지만, 적어도 도망치지는 않기로 했다. 내가 할머니를 보러 가는 것이 그녀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인지 이제는 상관없었다. 그저 그녀 곁에 있어야만 이 공포를 잠재울 수 있다는 본능이 내 몸을 움직였다.


병원으로 가는 길, 길가에서 풍겨오는 달콤하고 구수한 냄새에 발길을 멈췄다. "사장님, 군고구마 주세요. 넉넉히 요."


사장님은 노란 속살이 터져 나온 고구마를 종이에 담고 또 봉투에 담았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드릴 가장 예쁘고 뜨거운 놈들 두 개를 골라 코트 안쪽 가슴팍에 품었다. 식어버린 내 심장 대신 전해줄 온기였다. 고구마의 뜨거운 열기가 얇은 셔츠를 지나 가슴팍에 닿자, 볼을 스치는 겨울공기는 순간 더 차갑게 느껴졌지만 비로소 속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가슴속에 품은 고구마는 의식 없이 터져 나온 눈물처럼 뜨거웠다. 병원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다짐했다. 병실 문을 열면, 그 어떤 불안도 내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저 세상에서 가장 시시하고 평범한 손자가 되어 할머니에게 이 따뜻한 고구마를 꺼내 보여줄 것이다.


그것이 오늘 선택한, 가장 처절하지만 가장 위대한 생존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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