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도를 초과한 인생을 연기 중입니다

가면의 무게와 한도 초과

by 마가렛꽃

학과 공지라는 머리말을 단 메일이 수신함에 쌓여 있다. 열어보지 않아도 내용을 안다. 학과장이 자신의 저서에 들어갈 고대 언어 문헌 번역을 슬그머니 떠넘기려는 심산일 것이다. 예상대로 휴대폰이 진동한다. 학과장이다.


“김 선생, 바쁜가? 이번에 새로 들어가는 프로젝트 말이야, 지난번처럼 자네가 좀 봐줘야 할 것 같아서.”

“또 제가 해야 하나요?”라는 말은 목구멍 근처에서 점막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대신 나는 “네, 알겠습니다. 메일 확인할게요”라는 매끄러운 항복을 내뱉는다.


정교수 승진이나 다음 학기 강의 배정 같은, 내가 진짜 물어야 할 질문들은 차마 꺼내지 못한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고 스스로를 세뇌하지만, 그것은 달관이 아니라 항복에 가깝다. 이 학교에서 계약이 끝나면 또 다른 떠돌이 생활이 시작될 뿐이다.


“너는 왜 네 논문을 써서 증명하지 않아?”


헤어진 전 여자친구가 비수처럼 던졌던 말이 귓가를 맴돈다. 그녀는 몰랐다. 매일같이 눈앞의 구멍을 메우느라 온 힘을 다해 달리는 사람에게는, 내일을 설계할 에너지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시급,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는 초라한 자존심. 그 두 가지만 겨우 쥐고 있는 내게 미래는 사치다.


누군가 내 인생의 마스터플랜을 짜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게임 미션을 달성하듯 오늘 해야 할 일, 이번 달의 성과, 1년 뒤의 위치를 적어준다면 나는 기꺼이 그 명령에 순종하는 아바타가 될 텐데. 하지만 성공이란 무엇일까. 내가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저렴한 대체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한도 없이 스스로를 갉아먹기 시작한다.


카드 승인 알림은 대개 내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 온다.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 사이로 짧은 진동이 느껴지지만, 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도 화면은 자세히 보지 않는다. 요양원비. 이미 알고 있는 지출이다. 거울을 보지 않는다. 오늘 하루가 이미 끝났다고 몸이 먼저 판단했기 때문이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다. 요양원에서 맡았던 대용량 세제 냄새가 벗어 놓은 옷가지에서 희미하게 올라온다. 내일 빨아야지. ‘내일’이라는 말은 늘 많은 절망을 임시로 해결해 준다.


다음 날 아침, 카드사 앱을 연 건 우연이었다. 결제 예정 금액은 생각보다 아래쪽에 있었다. 숫자는 늘 차분했다. 기분과 다르게. 맞다. 숫자엔 감정이 없다. 눈앞의 숫자는 당장 파산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가 설정해 둔 ‘괜찮은 범위’의 마지노선을 이미 넘어서 있었다. 화면 하단에 작은 문구 하나가 깜빡였다.


[한도 조정]


그 문장을 한 번 더 읽는다. 읽는다고 해서 숫자가 변하지는 않는다. 사고는 아니다, 아직은. 요양원에서 급한 연락이 온 것도 아니고, 당장 통장이 바닥난 것도 아니다. 다만 확인하지 않았던 현실이 확인된 상태로 내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오후, 요양원을 찾았을 때 요양보호사가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한다. “어머, 교수님! 오늘도 오셨네요. 바쁘신 분이 할머니 사랑이 대단하셔.”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귓가에 감기자, 오전의 비참함이 마법처럼 휘발된다. 나는 익숙하게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통장 잔고는 바닥이고 대학에선 학과장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처지지만, 이 안방 같은 요양원 복도에서만큼은 나는 품격 있는 보호자이자 성공한 지식인이 된다.


가짜 안온함이 주는 쾌감은 마약 같다. 보호사가 내미는 믹스커피를 받으며 나는 잠시 생각한다. 밖에서는 0.5인분도 채 안 되는 내가, 이곳에선 완전한 1인분, 아니 그 이상의 대우를 받는다. 이 기만적인 연극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할머니의 방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어제보다 더 멍한 눈으로 창밖을 보고 있다. 나는 카드사 앱의 ‘한도 조정’ 문구를 떠올리며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내 인생의 한도 역시 이미 초과한 것은 아닐까.


사고는 대개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아무도 다치지 않은 순간에, 예의 바른 호칭과 차분한 숫자 사이에서,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는 바로 그 찰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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