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린 것과 두고 온 것의 차이

할머니의 고백과 나의 고백은 같다.

by 마가렛꽃

병원에서 쏟아져 나온 뒤, 습관처럼 카페로 도망쳤다. 진동 벨이 울리고 받아 든 뜨거운 아메리카노의 열기가 손바닥을 타고 뇌의 신경질적인 회로를 잠시 식혀주었다. 그런데 카페 한구석에서 뜬금없이 붕어빵 굽는 냄새가 났다. 달큼하고 텁텁한 그 냄새는 기억의 회로를 강제로 역류시켰다. 붕어빵을 사서 품에 안고 뛰어가면, "내 강아지 왔나"하며 나를 반기던 할머니의 주름진 손. 아랫목에 따듯하게 데워진 이불속으로 어서 들어오라는 그녀의 손짓이 그립다.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 웬만해서 받지 않는다. 하지만 촉이란 때로 예민해서 낯선 숫자가 주는 공포를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요양원 원장이었다.


“할머니가 오전에 낙상을 하셨어요. 대학병원 응급실 다녀왔고, 지금은 진정하고 쉬고 계십니다.”

"그리고 노년 우울증이 심해지셨습니다. 약 처방 드렸습니다."


무기력이 순식간에 공포로 치환됐다. 나의 불안을 치유하는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인 할머니, 그가 우울증이라니. 이젠 내가 완전해져야 한다.

떨리는 손으로 아메리카노 위에 알약 하나를 쏟아 넣었다. 카페인과 약물이 섞인 기묘한 액체를 들이켜며 붕어빵 한 봉지를 주문했다. 할머니에게 가야 했다. 그곳이 내가 유일하게 '가면 쓴 주인공 역할'이 아닌 '보호자' 역할로 존재할 수 있는 장소였으니까.


요양원 병실 문을 열자, 할머니는 팔과 어깨에 남색 보호 장치를 차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이전과 같았다. 미안해하는 직원들과 요양보호사의 시선을 뒤로하고 할머니 곁에 앉았다. 텔레비전 소리가 방 안의 공백을 메우고 있었다.


“왔구나, 나 괜찮아. 깜빡 졸다가 그만.”


반가움이 스친 몇 마디 말 뒤로 할머니는 이내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할머니도 나에게 가면을 쓴다. 내가 청소년 시절 그랬던 것처럼. 사실 다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루 일과를 조잘대며 해 드렸지만 모두 나의 허구였으며 바람이었다. 그녀에게 집단의 무시와 경멸, 따돌림을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래, 요즘엔 별일 없고?”


나는 길게 대답하지 못했다. 안선우라는 이름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대신 하찮은 세상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계급, 세대, 젠더, 갈등. 뉴스 속의 소음들. 할머니는 그 파편들을 듣다가 늘 그렇듯 내 쪽으로 기운 문장을 던졌다.


“인생이 가볍지 않다.”


위로인지 훈계인지 모를 그 말은 서른이 넘은 나를 여전히 유치원생 시절로 되돌려 놓는다. 처음 겪는 일과 감정을 어찌 이해할지 몰라 울먹이던 나를 감싸주던 그 말. "처음이라 그래, 다 괜찮아." 할머니는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혹은 결혼을 포기했다는 비겁한 고백을 할 때마다 "삶은 원래 무겁다"며 비겁함에 면죄부를 주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동물의 왕국' 같은 느낌의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황량한 평원 위에서 수사자 한 마리가 무리를 등지고 길게 하품을 했다.


“저놈 봐라. 노는 것 같지?” 할머니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응, 혼자 한가해 보이네, 암컷들은 바빠 보이는데” “아니다. 저놈은 지금도 온몸을 세우고 있어. 수놈은 느슨해지면 무리가 다 죽어.”


할머니의 말에 다시 화면을 보니, 수사자는 아주 얇게 눈을 뜨고 있었다. 그것은 휴식이 아니라 감시였다. 할머니의 얼굴에 오래된 시간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나는 할머니의 입김 냄새를 따라 해 보려 입을 벙긋거렸다. 비릿하면서도 따뜻한, 생의 냄새.


“오늘은… 안 오나?”


할머니가 허공을 더듬으며 물었다. “누가?” “아까 같이 살던 사람.”


그 말엔 이름이 없었다. 기억의 서랍이 뒤섞이기 시작한 것일까? 병약한 체력의 섬망일까? 나는 "다들 바쁘대"라는 아무 근거 없는 거짓말을 던졌다. 설득은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 할머니는 이내 "집에 가야지"라며 짐을 챙겼다. 여기가 집이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낯선 벽과 침대를 둘러보며 "아, 내가 깜빡했네"라고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투명해서 나는 물컵만 건넸다.


“너는 누구냐?”


장난 같은 물음이었지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애써 웃으며 "나지"라고만 답했다.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야속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누구인지 증명할 자신이 없어서였을까.

면회 시간이 끝나고 복도로 나오자 요양보호사가 따라붙었다. “참, 보호자 분. 대학교수시라 바쁘실 텐데 자주 오시네요. 비상 연락망은 그대로 유지할까요?” 대학교수라는 단어가 거슬렸지만 “네. 제가 제일 먼저 받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이런 사소한 일에도 포장을 하는 내가 싫다. 아니 굳이 정정하지 않은 것이다.


'주 보호자'. 방문증 옆에 적힌 그 단어가 내 가슴에 선명한 체크 표시를 남겼다. 나는 한 번도 선택한 적 없는 역할을 수행하며, 방학이라 시간이 많다는 두 번째 거짓말을 남기고 요양원을 나섰다. 나는 보통 사람들처럼 시간이 그렇게 바쁘지 않다. 그저 마음이 바쁜 것이다.


자동문이 닫히는 속도는 사람 하나가 세상에서 지워지기에 충분할 만큼 느릿했다.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지 않은 채 요양원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할머니가 섬망 증세로 중얼거렸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응급실에 다녀왔으니 기력이 쇠해서 나온 헛소리일 가능성이 크다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때는 두고 올 수밖에 없었어. 버린 게 아니야.”

"할머니 나도... 그래" 리고 작게 청자가 정해지지 않은 대답 아닌 변명을 지껄여도 봤다.


그것은 우리 둘 다 보고였을까, 아니면 나를 향한 뒤늦은 변명이었을까. 만약 정말 그녀가 누군가를 버린 것이라면, 나는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아니, 사실은 나 역시 그녀를 그곳에 두고 감으로써 매일 그녀를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도 틀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세상은 온통 오답투성이다. 나는 내가 내일 다시 요양원으로 향할 것을 안다. 그녀를 향한 사랑인지, 나의 불안 때문인지 이제 경계가 모호하다. 그 비겁하고도 숭고한 반복이 나의 유일한 처방전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이 이상한 찜찜함을 안고 잠을 청하기 위해 알약을 집는다.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이전 02화0.5인분의 생존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