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인분의 생존법

나를 괴롭히던 놈이 내 의사가 되었다

by 마가렛꽃

병원을 다녀온 첫 주에는 성실한 환자가 된다. 식탁 위 알약 갑을 크기별로 정렬하고, 식후 30분이라는 세계의 규칙에 나를 맞춘다. 하지만 이주쯤 지나면 약을 먹었는지, 먹었다는 착각을 먹었는지 모를 지경에 이른다. 정신을 차려보니 마지막 진료는 작년 12월이었다. 이미 두 달 치의 흰색 알약이 내 식도를 통과하지 못한 채 공중으로 증발해 버린 셈이다.


빈 약봉지를 구기자마자 지독한 불안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성인 ADHD와 틱장애. 내 뇌는 도파민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거나, 원치 않는 신호를 근육에 쏘아댄다. 두 증상은 상극이다. ADHD 약인 메틸페니데이트를 복용하면 집중력은 올라가지만 어깨와 목 근육이 통제 불능으로 튀어 오르는 틱이 심해진다. 반대로 틱 억제제를 늘리면 온종일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멍해져 강의실에서 칠판을 멍하니 응시하는 바보가 된다. 나는 늘 그 극단적인 시소 위에서 위태롭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 서커스 곡예사였다.


“당일 예약은 안 되시고요. 접수하고 한참 기다리셔야 해요.”


접수처 직원의 목소리는 건조한 모래알 같았다. 대기실 전광판 위로 내 이름 '김지수' 세 글자가 뒤로, 자꾸만 뒤로 밀려났다. 스마트폰을 쥔 손바닥에 끈적한 땀이 찼다. 오른쪽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실내조명이 너무 밝아서 생기는 일시적인 피로인 척 눈을 세게 비볐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 하지만 난 의식한다. 입을 삐죽이는 틱 증세가 나오려 했다. 집에 가고 싶다는 충동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두 번이나 삼켜냈다. 나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0.5인분이었으므로, 이 약마저 없으면 그나마의 형체도 유지할 수 없었다.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병원 벽면에 붙은 약력들을 하나씩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지점에서 시선이 화살처럼 박혔다.


[제5진료실 원장 안선우: 소아 및 성인 ADH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전문]


심장이 늑골을 부술 듯이 때리기 시작했다. 잊으려 애썼던 이름, 안선우. 설마 그 안선우일까. 고등학교 시절, 잘 정돈된 집안 배경과 매끈한 성적표 뒤에 숨어 나를 옥죄던 그 녀석. 그는 손을 더럽히는 법이 없었다. 그저 성적표가 나오면 내 것을 뺏어 들고 자신의 것과 대조하며 기묘한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그 미소는 무리에게 보내는 신호탄이었다. ‘자, 이제 이 모자란 놈을 마음껏 비웃어도 좋아.’

그는 늘 의대에 가야 한다고 입술을 씹었다. 공부를 너무 시키는 엄마를 죽여버리고 싶다며 서늘하게 웃던 열일곱의 그가, 정말 정신과 의사가 된 것일까?


복도 모니터에서 원장들의 홍보 영상이 흘러나왔다. 프로필 사진 속 남자는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어 안심했다. 하지만 이내 재생된 인터뷰 영상 속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사나운 눈매, 미세하게 튀어나온 입매, 그리고 말을 할 때마다 미세하게 실룩거리는 왼쪽 입꼬리. 화질을 뚫고 나오는 그 특유의 오만함. 틀림없었다. 안선우였다.


왜 하필 이곳일까. 이 동네에서 내 까다로운 두 가지 증상을 이해하고 약을 조절해 주던 유일한 병원에, 그가 다섯 번째 원장으로 부임했다.


분노보다 먼저 차오른 것은 굴욕이었다. 나는 여전히 약 한 봉지에 삶의 질이 결정되는 고용 불안 상태의 시간강사인데, 그는 타인의 정신을 난도질하고 처방을 내리는 심판자가 되어 있었다. 얼마 전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정교수가 된 대학 후배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었다. 그에겐 죄가 없으니까. 하지만 안선우는 아니었다. 타인의 열등감을 먹고 자란 잔인한 우월주의자가 마음이 아픈 자들의 안식처를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부조리극이었다.


"환자분, 오늘 담당 원장님 휴진이셔서 다른 진료실로 배정해 드릴까요?"


직원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4진료실. 안선우의 방이 아니다. 다행히 오늘은 그의 휴진 날이라 진료실 안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앉아있을 의자, 그가 만졌을 차트, 그가 내뱉었을 위선적인 조언들이 가득 찬 공간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나는 거세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일단 오늘의 약을 받아 이 지옥 같은 불안을 잠재워야 한다. 진료실을 나오며 나는 결심했다. 아마 내일부터 나는 이 병원이 아닌, 아주 멀고 낯선 다른 병원을 검색하게 될 것이다. 틱처럼 제어할 수 없이 툭 튀어나오려는 불안한 감정을삼 키며, 나는 안선우의 이름이 박힌 브로셔를 손 안에서 잘게 구겼다.


제5진료실에 들어갈 일을 절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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