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피하고 싶은 사람이 나의 유일한 퇴로가 될 때
휴대폰 진동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이번에는 카드사 알림도, 학과장의 업무 지시도 아니었다. 5년째 내 뇌의 기복을 기록해 온 병원에서 온 문자였다.
[안내] 김 원장님의 학회 일정으로 인해, 다음 진료는 제5진료실 안선우 원장님으로 변경 가능하십니다. 진료를 원하시면 '네'라고 답장 부탁드립니다.
전화 공포증을 앓는 내게 병원은 늘 문자로 용건을 전한다. 이 다정한 세심함이 오늘따라 잔인하게 느껴졌다. 만약 전화로 이 소식을 들었다면, 나는 당황한 침묵 끝에 수치스러운 공백을 고스란히 들키고 말았을 것이다.
단 세 음절의 이름. '안. 선. 우.' 액정 위에 떠오른 그 이름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내 목을 죄어왔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내 뇌의 고장 난 회로를 가장 잘 알고, 할머니의 증세와 그 뒤에 숨겨진 우리의 위태로운 관계를 가장 깊이 이해해 주던 김 원장의 부재가 이토록 거대할 줄은 몰랐다.
설마 나의 차트 기록을 그가 봤으려나?
이제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마주치기 싫은 사람이 내 삶의 열쇠를 쥐고 나타났다.
나는 답장을 쓰지 못한 채 창을 닫았다. 마침 약도 조금 남아 있다. 미친 듯이 포털 사이트에 주변 병원을 검색했다. 지도 위로 붉은 점들이 쏟아졌지만, 그 어디도 내 까다로운 틱 증상과 ADHD 약물을 한꺼번에 조절해 줄 신뢰를 주지 못했다. 처음 나의 병을 발견해 주고, 벼랑 끝에서 약봉지를 건네주던 그 따뜻한 손길을 대신할 곳은 없었다.
그래, 약만 받으면 된다.
거울 앞에 섰다.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눈만 내놓은 채 거울 속의 나를 응시했다. '이렇게 하면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내 헛된 희망임을 깨닫는다. 병원 차트에는 내 이름, 생년월일, 그리고 5년 치의 진료 기록이 박제되어 있다. 안선우가 모니터를 켜는 순간, 그는 '김지수'라는 이름 석 자와 함께 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마음껏 유린했던 한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내 트라우마의 주동자가 나의 치료자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처형일 뿐이다.
나는 침대에 주저앉았다. 안선우는 과연 나를 기억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가해자에게 피해자는 스쳐 지나간 풍경 중 하나일 뿐이지만, 피해자에게 가해자는 삶의 배경 전체를 잠식하는 거대한 흉터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나를 향한 자비일까, 아니면 존재를 지워버리는 가혹한 무시일까.
그때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의 증상이 심해졌다는 소식이었다. 낙상 사고 이후 할머니는 부쩍 밤마다 헛것을 보며 비명을 지른다고 했다. 나라는 삶의 유일한 안정제가 없으면 할머니는 다시 그 캄캄한 공포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할머니의 평온을 지키기 위해 난 불안에 잠식될 수 없다. 그녀의 앞에선 완전체가 되어야 한다.
생각의 깊이는 쓸데없이 깊고 사람을 힘들게 한다. 대인관계 발목을 잡는 틱, 집중력을 갉아먹는 ADHD, 그리고 할머니의 얼마 남지 않은 밤. 이 모든 것을 안선우가 알고, 나의 처방권을 쥐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다시 문자 창을 열었다. 커서가 눈물처럼 깜빡인다. '네'라는 단 두 글자를 치는 데 이토록 많은 근육의 떨림이 필요한 줄 몰랐다. 이것은 단순한 진료 예약이 아니다. 나의 치부를 드러내고, 나의 가장 아픈 곳을 적의 손에 맡기는 항복 선언이다.
손가락이 자판 위를 배회하다 멈춘다. 나는 결국 답장을 보내지 못한 채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창밖은 어느새 어둑해졌고, 방 안에는 거친 숨소리만 가득했다.
아직은 사고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결국 내가 그 진료실 문을 열게 될 것이라는 걸.
병은 꼬리에 꼬리를 물기에 이상한 강박이 있다. 병원은 꼭 그 병원이어야 한다.
새로운 병원에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하고 나에게 맞는 약이 없을 수도 있기에 큰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또 다른 새로운 사람들에게 나의 병을 알리고 싶지 않은 옹졸함도 있다.
할머니를 위해서, 혹은 무너져가는 나를 지탱하기 위해서. 나는 나의 가해자를 '구원자'로 불러야만 하는 이 잔인한 시나리오의 주인공으로 낙점되었다.
만약 그가 나를 보고 웃는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