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송 Jan 22. 2021

삼촌과 베트남 커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커피를 내리고 은은한 향이 풍겨오는 시간이 나에겐 매일의 힐링타임이다. 코로나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일상이 반복되면서 더욱 그렇다. 근래 먹던 원두가 다 떨어졌고 작은 기분 전환을 위해 스타벅스의 무려 리저브 원두를 사 봤지만 그닥 감동적인 맛과 향은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서랍에 넣어둔 커피 봉투가 생각났다. 삼촌이 나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보내주셨던 이름도 어려운 커피는 정말 너무 맛있어서 포장을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두었다.

에너지 넘치고 호탕한 삼촌은 그래도 내가 집안의 가장 큰 조카라고 늘 뵐 때마다 많이 반겨주셨다. 어릴 때 부르던 '삼촌'이란 호칭을 나는 다 커서도 그대로 사용했다. 삼촌은 한 때 베트남에서 근무하신 적이 있다. 내 가정을 가질 정도로 나는 장성했고 전혀 살가운 조카가 아닌데도 삼촌은 손수 우리 집으로 베트남의 맛난 커피들을 보내주시곤 했다. G7은 인스턴트인데도 너무 맛있어서 믹스커피의 신세계를 보여줬더랬다. 당시에는 국내에서 판매되는 것은 못 본 것 같다.

서랍 속에 두었던, 이사를 오면서도 버리지 않고 고이 가져온 빈 커피 봉투를 오랜만에 꺼내봤다. 인쇄된 유효기간에는 2016이란 숫자가 있다. 그 무렵에도 베트남에 계셨는지 다녀오실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삼촌 커피 너무 맛있었어요."라고 했던 내 말을 기억하시고 보내주셨던 것 같다.
이름을 읽기도 어려운 베트남 문자로 Trung Ngyen이란 회사의 제품인데 이걸 '쭝웬'이라고 읽는지도 이번에 새로이 알았다. Tr이 만나면 'ㅉ' 발음이 나고 Ng가 만나면 '응' 발음이 된단다. 뭔가 갈증이 해소되는 듯.
이전의 G7도 같은 '쭝웬'의 커피이고 베트남에서는 스타벅스보다도 인기가 많은 현지 브랜드라는 사실도 말이다.
검색창에는 눈에 익은 패키지도 보인다. 역시 삼촌이 보내신 적이 있는 다람쥐 그림이 있는 커피 이름은 '콘삭'.

서랍 속 봉투의 Legend란 이름을 검색하니
"아, 이건 진짜 프리미엄 커피였구나!"
커피 포장을 열 때부터 코끝을 향기롭게 하는 초콜릿향. 매번 커피를 내릴 때에도 마실 때에도 오감을 행복하게 부드럽게 감싸주었던 바로 그 커피.
'레전드'는 다른 것보다 가격대가 훨씬 사악한 관계로 찾아보니 대략 그다음으로 훌륭하다는 '상타오8'을 주문했다.

'상타오8'이 오늘 도착했다. 스타벅스 리저브 원두가 아직도 많이 남았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해 포장을 뜯었다. 초콜릿향.
"그래 바로 이런 향이었어"
드립하면 보리차인 듯 은은하게 풍기는 향. 커피 맛은 '레전드'가 더 훌륭했던 기억이다. 그래도 지난 '행복했던 순간의 나'를 소환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삼촌의 마음들을 헤아려본다.

"칠곡에 아이들과 놀러 와라. 쉬기 정말 좋아."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지신 후에 공기 좋은 곳에 집을 마련 해 내려가 계셨다. 갑작스런 병의 진단에 일가친척들 집안 분위기는 어두웠지만 삼촌 본인은 잘 견디고 계신 것 같았다.
어느 날 나의 일상 안부를 묻는 삼촌의 전화를 받았다. 당신은 잘 지내고 있고 컨디션도 아주 좋다고. 칠곡 집에 오면 아이들과 놀기도 좋을 테니 한번 들르라고.
통화가 반가웠고 밝은 목소리에 안도의 마음도 들었지만 '삼촌이 왜 나에게 뜬금없이 전화를 하셨지?'란 의아함이 없지는 않았다. '딸이 없으셔서 혹시 적적하신가?' 아이들과 가보려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가면 괜히 더 힘들고 번거로우실 거라 생각도 했다.

나중에 49재 때에야 가 본 칠곡 집은 아름다운 풍경이 일품이었다. 즐기며 대회 수상까지 하셨던 서예 실력을 가진 삼촌의 작품들과 내가 기억하는 삼촌의 건강하고 유쾌한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에게 놀러 오라고 전화하셨던 그때에 삼촌의 마음은 괜찮은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병세가 심하게 악화되기 이전이었음에도.
아이들이 시끄럽게 하고 어지르더라도 그때 갈 걸.
그냥
밥을 함께 먹고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때 나에게도 손길을 내미셨던 것임을 세월이 흘러 이제야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 죄송하고 안타깝다. 그리고 지금도 떠올리면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셨음에 감사한다.

작가의 이전글 밥이나 먹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