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댁 방문 이후 적잖은 충격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주했던 일들 중 계약금만 받고 아직 진행하지 않은 일들은 양해를 구하고 모두 취소했다. 돈은 아쉬웠지만, 더 이상 내 이름을 파는 장사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성공의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일지라도, 이렇게까지 비굴하고 싶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오래된 외장하드를 꺼내 컴퓨터에 연결했다. 학생 때부터 모아 온 과제물들이 들어있었다. 하나하나 열어보며 내용을 살펴보니, 그 시절의 나는 패기만은 넘쳤던 것 같다. 지금 보면 보잘것없었다. 앞뒤 맥락도 맞지 않는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며 입만 살아 있었던 흔적이 가득했다. 패기 빼고는 못 봐줄 수준이었는데, 어떻게 취직을 했는지 의문이다.
지금 와서 보니 학생 때는 공공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았나 보다. 지금처럼 돈 되는 일에만 매달리던 시절은 아니었다.
복잡한 마음에 사무실 밖을 나와 무작정 버스를 탔다. 광화문으로 향했다. 운전하며 자주 지나던 창밖 풍경이 낯설게 다가왔다. 한참을 지나니 터널 위에 다닥다닥 모여 있는 집들이 눈에 들어왔고, 발길은 자연스레 그곳으로 향했다. 왜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는지 의문스러웠지만, 지금은 그곳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버스로 갈아탔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동안, 이 길을 버스가 오른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마을 초입에 다다라 내려보니, 경사 위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절도 있었고, 교회도 있었다. 나는 처음 이런 곳을 마주하며 나의 부족함을 느꼈다. “이런 곳도 안 와본 주제에 건축사라니…”
마을을 걸어보니 대부분이 좁은 경사로와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집은 서로 붙어 있어 화재나 범죄에 취약해 보였다. 무엇보다 이곳은 소방차 진입이 불가능했고, 간이 소화전이 없다면 답이 없을 듯 보였다.
이런 열악한 곳이야말로 건축사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반듯하고 비싼 땅 위에서만 설계하지 않았는가. 스스로 반성했다.
반성과 성찰에 잠겨 있을 때쯤, 대문 앞 계단에 앉아 볕을 쬐는 할머니를 마주쳤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여쭸다.
“할머니, 여기 사세요? 불편한 점은 없으세요?”
할머니는 볕을 쬐며 웃으셨다.
“여긴 햇빛이 잘 들어서 참 좋아. 창으로 빛이 들어오면 얼매나 따뜻하고 좋다고. 하늘도 잘 보이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열악한 환경이 그들의 마음을 초라하게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편견일 뿐이었다.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위신, 명예, 돈의 무게가 한순간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화려한 대리석도, 값비싼 가구도 내 머릿속에 박혀있는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저 창 하나, 볕 한 줄기,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자리만 있으면 충분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건축이란 허울 좋은 명예가 아니라, 삶을 따뜻하게 감싸는 볕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