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신 ep.8 시나리오

by Celloglass

옛 지도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길을 나섰다. 하지만 건물 사잇길은 실외기와 쓰레기 더미로 막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길의 형태라도 남은 곳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공실 상태로, 재개발만 기다리다 역할을 잃은 곳들이다. 공간의 재생은 꼭 무언가를 채워야만 활력을 되찾는 건 아니다. 나는 이 길을 연결하고 빛만 비춰준다면 건물들이 제 역할을 다 할 것 같았다.

나는 부동산으로 곧장 향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지금 내 생각을 말씀드렸다. 본인들도 처음 왔을 때는 건물 사잇길로 왕래가 실제로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재개발 소식이 돌자 외지인들이 건물을 하나둘 매입했고, 이후 길은 막혀버렸다고 했다.


조금 더 내겐 확신으로 다가왔다. 혹시 이 길을 다시 열 수 있느냐고 여쭤봤다. 대부분 포기한 건물이니 잘 설득하면 길을 터줄 수도 있겠지만, 청소 같은 일은 직접 해야 한다고 했다.


시작이라도 해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할아버지께서 건물주에게 연락을 해주시면, 나는 직접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설명드리기로 했다.


나는 그분들에게 이곳의 재생 방안을 설명해야 한다. 어떻게 길을 연결하고, 어떻게 빛을 밝힐 것인지. 그걸 담은 자료가 필요했다. 며칠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다. 다음날 사무실로 가 직원들에게 설명했고, 설계 계획안을 만들어달라 요청했다.


일주일 후, 사무실에서 계획안이 도착했다. 내 시나리오를 충실히 반영했고, 몇몇은 아이디어를 덧붙여 역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절반은 수용했고, 나머지는 내 생각과 달랐다. 수정된 내용을 다시 글로 정리해 보냈고, 팀은 더 완성도 높은 계획안으로 응답했다.


어느 사잇길을 활용할지 건물 리스트를 작성했다. 건물은 많았지만, 실제 소유주는 몇 사람에 불과했다.

1층으로 내려가 부동산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지금 표시된 건물주들과 연결 좀 부탁드립니다.”


할아버지는 안경을 머리 위에 걸친 채, 휴대폰을 열어 연락처를 찾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건물주들을 직접 찾아뵈어야 한다. 그들은 이미 여러 번 개발업자들에게 속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사기꾼으로 비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동산 할아버지 건물에 세입자로 들어와 있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됐다. 할아버지가 손수 연결 다리 역할을 해주신 이유도 같다.


일단 부딪쳐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곳에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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