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신 ep.10 다짐

by Celloglass

집에 있는데 한 분 한 분 문자로 연락을 주셨다. 물음에 대한 답을. 계약서에 원상 복귀 조항을 명확히 해달라는 게 대부분의 요구사항이었다. 그렇다. 허락해 주셨다.


부동산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몇 분이 직접 현장에 다녀가셨다고 했다. 그분들도 잊고 지내던 건물이었는데, 갑자기 궁금해졌던 모양이다. 누구든 이런 상황을 겪는다면 쳐다도 보기 싫었을 것이다. 애태웠을 시간, 15년이었다.


재개발이 설정되면 매매도 힘들고, 신규 건축허가도 제한된다. 재개발을 위한 행위를 제외하고는, 건물주로서 권리 행사가 사실상 봉인되는 것이다. 중간에 지분 쪼개기 같은 일이 발생하면 사업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과거 인천에서는 구도심을 재개발로 묶어두고 매립을 통해 신도시 건설에 나섰다. 지역 경제는 신도시로 이동했고, 자산가들도 생활의 터전을 옮겼다. 구도심은 버려졌다. 10년 넘게 묶여 있다 보니 집에 물이 새도, 담이 무너져도 손을 댈 수 없었다. 원주민들은 조합을 탈퇴하고 뜻을 모아 재개발 해체를 요구했다.


이곳도 다르지 않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이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기능이 마비돼 버렸다. 그리고 방치됐다. 온기는 사라지고 한기만 남았다. 원주민들은 누구도 원치 않지만 되돌릴 수도 진행할 수도 없다.


주소지만 옮겨져 있다고 모두 원주민은 아니다. 누군가는 재개발을 노리고 들어와 건물을 매입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신축 건물을 통해 지분 쪼개기를 시도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 공사 가림막이 걷히면, 원주민의 얼굴은 사라지고 새로운 얼굴들이 자리한다. 그들은 조합을 만들고 재개발을 시작한다.


수십 년간 터전을 지켜온 이들은 다수결의 원칙에 밀려 쫓겨난다. 가진 것 없다는 이유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것이다. 건물을 가진 원주민조차 사정은 다르지 않다. 수십 년을 그곳에 살아왔어도, 조합장의 뜻에 따라 목소리는 묻힌다. 건설사도 다르지 않다. 결국 조합장은 이 지역의 유일한 결정권자이자 독재자가 된다. 이 과정에서의 투표는 큰 의미가 없다. 조합원 대부분은 조합장과 경제 공동체일 테니까.


간혹 이곳처럼 조합의 일탈이 발생하면 사업은 좌초된다. 누군가 지분 관계를 복잡하게 얽혀놓으면, 새로운 시행사나 건설사는 권리 관계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검토 조차 하지 않는다. 전국의 수많은 공사 현장들이 손도 못 대는 사연은 각기 다르지만 같은 맥락 속에 존재한다.


우리 도시의 개발은 민간사업에 의존한다. 다수결로 다수를 차지하면 무소불위의 결정권을 갖는다. 다수의 결정은 정당성을 얻고, 공공은 관여하지 않는다.


그렇게 오늘도, 방치된 채 시간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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