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신 ep.28 기억의 전시관

by Celloglass

서울 골목길 프로젝트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쫓겨났었지만 이곳에서는 막아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늘 내 의도와 다른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누군가는 그랬다. 왜 자식들 좋은 일만 시키냐고. 돈 주지 말라고.


돈을 주지 않고 법정까지 가서 5~6년 재판을 이어간다고 한들 우리는 얻을 게 하나도 없다. 분홍신 할머니 마음은 어떨까. 6년이란 시간이 그분에게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일 수도 있다. 난 그렇게 잔인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합의안을 택한 것이다.


과거였다면 원리 원칙을 따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나를 바꿨다. 정체성을 묻던 시간이 내 삶을 변화시킨 것이다.


빈집을, 귀신의 집을 읍내 주택 가격의 1.5배에 준다는 게 납득은 가지 않겠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 선택이 우리 마을의 성장을 이끌었다. 이제는 매일 방문객이 마을 거주민의 두세 배에 이른다. 당산나무 아래 평상엔 더 이상 나의 자리는 없다. 백패커와 관광객들의 차지다.


그 무렵 눈에 들어온 방치된 건물 하나가 있었다. 이장님 말씀으로는 과거 정미소 자리라고 했다. 생뚱맞은 위치 같지만, 농사를 지어 곡식을 탈곡해 바로 읍내로 내다 팔기 좋은 자리였다고 한다.


내부가 궁금해 이장님과 함께 들어갔을 때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먼지만 쌓여 있었을 뿐, 세월을 견딘 기계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곧바로 이장님께 말했다.

“이장님, 이곳을 우리 마을의 대문처럼 쓰면 어떨까요. 아파트에 큰 문주 있잖아요. 여기에 마을 역사를 기록하면 좋을 것 같아요.”

큰일 치른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지랄이라 신다.


핀잔을 들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당장 예비역들을 소집했다. 함께 쓸고 닦고 내부를 정리했다. 기계들을 밖으로 꺼내 씻어 햇볕에 말렸다. 탈곡기를 비롯해 기계들을 재배치했다. 벽에는 액자 걸 자리를 마련하고 가운데는 물품을 전시할 선반을 준비했다.


마을회관에서 점심을 먹으며 어르신들께 부탁드렸다. “이곳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나 사진을 기증해 주시면 전시관으로 꾸미겠습니다.”


빛바랜 결혼사진, 농번기 막걸리를 나누던 사진, 오래된 술병. 참빗, 인두, 숯불 화로, 호롱불. 어르신들은 하나씩 내어주셨다.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었다.


그렇게 우리의 대문은 역사 기록관이자 전시관이 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의 전시관’이라 불렀고, 어르신들도 직접 오셔서 둘러보셨다.


“하간, 요새 젊은것들은 저게 뭣이 좋다고 저러는지 원.”


좋으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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