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대탈출
어느 순간부터 집주인이 전화를 안 받기 시작했다.
내 마음은 점점 타들어갔고,
일은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하루 종일 핸드폰만 쳐다보던 중
집주인에게서 전세보증보험 청구금액의 임차인분을 납부해 달라는 문자가 왔던 게 생각났다.
그 문자에 찍힌 청구금액 납부서에 앞집도 있었던 게 생각났다.
그래 앞집도 그 사람 소유였어.
늦은 시간이었지만, 초인종을 눌렀다.
긴 침묵 끝에 “누구세요?”
앞집인데요. 잠깐 얘기 좀 나누자며 불러내
그간의 상황을 설명했고, 집주인이 연락이 안 되고 있으니 연락이 닿으면 서로 알려주기로 하고 번호를 교환했다.
전세금을 못 돌려받는 것도 모자라
매달 대출이자를 갚아야 하는 상황.
속은 타들어갔다.
보증보험을 알아보던 중, "한 건물에 한 세대만 보장해 준다"는 말에 귀가 번쩍였지만
확인해 보니 그건 허위였다.
바로 이 지점부터다.
부동산, 중개인, 집주인까지 전부 의심하기 시작한 건.
신청도 순탄치 않았다.
전세사기 피해자가 많아 신청 예약만 2~3개월 후부터 가능했다.
먼저 할 수 있는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급한 마음에 관할지방법원부터 갔다.
임차권등기설정 서류를 작성하고, 지하 복사집 가서 복사하고, 올라와서 다시 제출하고.
기다리고... 기다리기를 반복해 겨우 접수했다.
누가 쳐다보지도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바보가 된 기분이었고
모두가 날 비웃는 기분이었다.
이런 곳에 덩그러니 앉아서 기다리는 내가...
싫었다.
솔직히 법원이란 곳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흉악범들이나 가는 줄 알았지.
내가 이곳에 오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좌절도 잠시.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보증보험금이 대출 만기일을 넘기기 때문에
은행에 가서도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뒤돌아 나오는데 생각났다.
이 은행도 부동산에서 대출을 알아봐 준 곳이었다는 게.
이제 내 눈에는 모든 사람들이 사기꾼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돌려받기도 전에 죽을 것만 같았다.
보증보험을 통해 보증금을 돌려받는 과정 중 제일 황당한 일이 있다.
보증보험 신청 서류 중 집주인의 ‘인감도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임대인이 전세금 반환을 하지 못하니 보증보험을 통해 보증금을 돌려받는 것에 동의한다는 서류다.
말 그대로, 나를 사기 친 사람에게 가서
“사기로 당신을 고소할 테니 당신 도장 좀 찍어주세요.” 해야 되는 꼴이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래도 마음을 다잡았다.
소주 몇 잔 걸치고, 주문을 외웠다.
“나는 인자하다... 나는 인자하다...”
마음을 최대한 가라앉히고
태어나서 가장 친절한 목소리로 집주인에게 연락했다.
최대한 ‘나는 당신 편이다’라는 느낌을 줬다.
요즘 뉴스 안 봤냐, 명의 빌려줬다는 말하면 전세사기로 구속된다.
임차인들과 좋은 관계 유지하면서 변재 하려고 노력 중인걸 보여줘야 된다. 그렇다면 나도 당신이 노력했다는 거 증언해주지 않겠냐.
일단 주말에 만나자.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방법이 생길 수도 있고, 자초지종도 듣고 싶다. 그리고 서류 하나에 인감도장 필요하니 챙겨 오셔야 된다. 별건 아닌데 날인이 필요하다.
거짓말도 기술이다.
누가 누구에게 사기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난 살고 봐야겠다란 생각밖에 없었다.
문득 앞집 여자가 떠올랐다.
문자를 보냈다.
“주말에 집주인 만날 예정입니다. 문 앞에 서류 붙여놨으니 인감도장 찍어주시면 받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일요일,
고시원 건물 앞에 도착했다.
두 눈으로 확인하니, 더 참담했다.
그래도 화는 참았다.
도장만 받아오면 된다. 딱 거기까지다.
“나는 인자하다... 나는 인자하다...”
내가 살기 위해서다.
커피숍에서 어렵게 설득해서 도장을 받았다.
앞집 여자에게도 전달했다.
보증보험 접수방법, 법원 절차까지 상세히 문자로 남겼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그냥 2년 연장할까 봐요.”였다.
막상 서류를 준비하려니 너무 복잡하다는 게 이유였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2년 뒤에 상황이 어떻게 될 줄 알고,
기껏 도장받아다 줬더니.
괜한 짓을 했나 싶었지만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사람으로서 다시 한번 얘기해 줬다.
“지금 하셔야 돼요. 진짜 큰일 나요.”
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녀도 결국 서류를 챙기는 모양이었다.
“가난은 나랏님도 못 구한다”는 말.
진짜 절감했다.
뉴스에서는 매일같이 경고하지만,
당사자가 되기 전까진 남의 일일 뿐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럴 것이다.
바보들이나 당하는 거지.
그렇다.
전세사기의 기하급수적 피해자가 발생하면서 관할이 이관되고, 담당자도 바뀌길 여러 번.
기약 없이 하루하루 맘 졸이며 보내야 했다.
신청하고 거의 6개월,
드디어 연락이 왔다.
그리고 탈출에 성공했다.
그 지옥 같은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