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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원서 읽기, 독하지 않은 내가 과연 가능할까?

첫 영어 원서 완독기

by 셀셔스

영어 잘하는 사람들, 특히 한국에서 영어를 독학으로 공부해 유창해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무조건 많이 영어에 노출되세요

그러면서 여러 가지를 추천한다. 좋아하는 관심 분야의 영어 영상 계속해서 보기 (예를 들면 스포츠를 좋아하면, 스포츠 영상들을 한글 자막 없이 보기), 영어 원서 읽기, 영자 신문 읽기. 이 정도가 대표주자일 것이다. 만약 작심삼일 올림픽이 있으면 나는 올림픽 챔피언을 할 자신이 있다. 대표주자들을 다 해보고, 작심삼일로 포기했다.


영어 영상 보기

한국어 자막 없이 영상을 보면 내용이 이해가 안간다. 답답해 미쳐 버린다.


영어 원서 읽기

좋아하는 책을 골라보라고 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해리 포터를 골랐다. 한국어 번역본을 읽을 땐 술술 넘어가더니, 영어로 보니까 무슨 소리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한 장 넘어가기가 힘들다. 책장에 멋지게 꽂혀있다. 꽂혀만 있다. 먼지와 함께.


영자 신문 읽기

비싼 돈 주고 산 뉴욕 타임스. 한마디로 노잼이다. 읽히지가 않는다. 단어가 너무 어렵고 지루하다. 뉴욕타임스 단어 정말 어렵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라 사실 막 피부에 와닿지도 않는다.




실패와 포기를 거듭하던 내가, 최근 한글 자막 없이 영화 보기와 영어 원서 완독을 성공했다! 나의 참을성이 늘어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우선, 내가 성공한 첫번째 영화는 '라따뚜이'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다. 한글 자막 지원이 안되는데 영화는 보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영어 자막을 켜놓고 봤다. 이 영화는 어린이용이라 대사가 매우 짧다. 그리고 영어를 이해 못 해도 영상만 봐도 대충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간다. 마치 말을 잘 못하는 유아들이 뽀로로나 아기 상어를 보고 이해하는 것처럼. 그렇다고 내용이 유치하지도 않다. 영국의 유명 쉐프 고든 램지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 영화라고 한다.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요리가 영화의 주제였다. 한번 쭈욱 보고 나니까 내용을 대충 아는데, 군데군데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어서 집안일을 하며 다시 틀어놓았다. 그러니 이제 조금 더 잘 들린다.



그리고 존윅4를 영어자막을 켜놓고 봤다. 존윅은 별 대사가 없이 영화 내내 총만 쏴댄다. 주인공 키아누 리브스의 대사는 영화 내내 합쳐서 스무 문장이나 될까? 역시 영어를 잘 못 알아들어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으니, 한국어 자막이 없어도 포기를 하지 않고 끝까지 보게 된다.















유퀴즈온더블록에 나온 구글의 김은주 디자이너가 영어 원서읽기를 꾸준히 하며 영어실력을 늘렸다고 한다. ‘나 같은 게으른 인간이 과연?’ 이라며 나 자신의 근면성에 대한 불신과 해리포터 실패의 경험으로 도전해볼 생각조차 안 했었다. 그런데 나도 드디어 영어 원서 1권 완독에 성공했다.


책 제목은 The summer I turned pretty (내가 예뻐진 여름). 우리나라에는 넷플릭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시리즈로 알려진 작가인 한국계 미국인 제니 한의 소설이다. 이걸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좋아하는 로맨스 장르라서. 나의 10대 때부터 은밀한 취미인 로맨스 웹소설 보기와 같은 선상에 있다.

또 영어 원서책 샀다가 책장 한 구석에 장식품으로 전락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전자책 아마존 킨들 언리미티드를 구독했다. 밀리의 서재처럼 구독료를 내면 전자책을 무제한으로 볼 수 있는 서비스다.


“더 빨리가!“ 나는 스티븐의 어깨를 찌르며 그를 재촉했다. “자전거 타고 있는 꼬마 지나치자”

이 소설은 간단한 구어체들로 이뤄져 있다. 중학교 영어 본문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리고 로맨스 소설이라 내용이 뻔하다. 여자 주인공이 두 형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내용이다. 통속 소설은 언제나 재밌다. ‘음... 이 순간엔 키스하겠군’ 하면 키스를 한다.




이런 소소한 성공을 성취하며, 여태까지 실패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내 수준보다 어려운 콘텐츠를 골랐었기 때문이다. 나의 영어 구어체 수준은 잘 봐줘야 미국 초등학생 고학년 수준이다. 보스턴 우리 동네의 길거리를 지나다니다 보면 4-5살 정도의 어린이들이 부모님에게 쫑알쫑알 하는게 종종 보이는데 어떨 때보면 나보다 영어가 유창하다. 제이의 조카들이 10살 정도 되는데 그들의 영어 유창성은 나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나의 영어 문어체나 지능, 지식, 논리력은 어른 수준이고 (영어로 논문을 쓸 정도니까) 나의 물리적 나이도 어른이니까, 내 스스로의 진짜 영어 실력도 어른이라고 과대평가했다. 돌이켜보니 뉴욕타임스나 영어 원어민 화자를 대상으로 하는 영상처럼 어른들을 위한 콘텐츠는 너무 어려우니 마치 따로 시간 내어 또 공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해리포터처럼 일상과 동떨어진 영어를 쓰는 걸 골랐으니 (일상 생활에서 마법 주문을 외울일은 절대 없다) 이해가 잘 안 가서 재미가 없고 어려웠던 것이다. 오답 끝에 찾은 나의 영어 실력 향상의 정답은 “재밌고 쉬운, 그러나 유치하지는 않은, 콘텐츠를 고른다” 이다.


이번엔 어릴 때 봤던 디즈니의 실사판 라이온킹을 영어로 보려고 한다. 띵작이니까 재미는 보장 + 어린이용이라 쉬울테니까.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나의 영어도 어른이 되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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