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의 끝내주는 참을성
워싱턴 DC에 엄마와 함께 놀러 갔다가 보스턴으로 돌아오는 미국 국내선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비행기는 오후 4시 이륙 예정. 그런데 오후 4시가 넘어도 탑승할 기미조차 안보였다. 한참을 기다리니 안내방송이 나왔다.
”비행기가 간 밤에 연료를 안 채워서 비행기가 못 뜨고 있습니다“
입이 떡 벌어졌다.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라니... 자동차를 운전해도 장거리 뛰려면 기름 채우는게 우선인데...
웃기게도 내가 타고갈 비행기의 파일럿도 나와 나란히 앉아서 탑승구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젊은 여자가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Sir, 담배 한 대 피우고 오려고 하는데 그 정도 시간 될 것 같나요?” 파일럿이 답했다. “당연. 더 오래 걸릴 테니 편하게 갔다 와”
파일럿의 말은 맞았다. 두 시간 넘게 기다린 끝에 오후 6시 30분이 넘어서야 탑승을 했다. 이제 좀 출발하나 했더니, “다른 비행기 뜨는 거 기다려야 해서 이륙 지연된다”는 기장의 안내 음성이 나온다. 이쯤 되니 여기저기서 야유가 나온다. 하지만 몇몇의 야유가 전부였다. 다들 부스럭 부스럭 하면서 안전벨트를 풀고 편한 자세로 본격 대기할 준비를 한다. 결국 우리 비행기는 예정 시간보다 3시간 30분 늦게 워싱턴 디씨 레이건 공항에서 이륙했다. 같이 비행기를 기다리던 엄마가 말한다. “미국 사람들 진짜 인내심 끝내준다”
미국인들의 끝내주는 인내심을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지하철과 지하철 플랫폼에 에어컨 안 나오는 건 약과, 지하철 문 한쪽이 안 열려도 그냥 달림, 지하철 역 안에 비둘기가 들어와서 똥을 싸대는 건 일상.
올라가는 방향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나 걸어가야 해도 아무도 항의 안 함.
운전면허사무소 민원 대기시간 1시간은 기본.
아파트 엘리베이터 두 대 중 한대가 2주 넘게 고장 나도 고칠 생각을 안 하며, 스타벅스에 대기 줄이 어마어마한데 바리스타들은 웃고 떠들며 천천히 음료를 제조한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막 뛰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미국인들의 말도 안 되는 참을성에, 국가번호 82, 빨리빨리(8282)의 나라 출신인 나는 속이 터질 뿐이다. 그런데 로마에 있으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나도 모르게 점차점차 그런가 보다 하게 된다. 물론,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한국인의 붉은 피가 빨리빨리를 아우성 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