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이지만은 않은 미국 생활
디즈니와 픽사가 만든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은 최근에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불, 물, 공기(구름), 흙 4개의 원소들이 살고 있는 ‘엘리멘트 시티’. 영화의 주인공은 불의 원소인 '앰버'다. 앰버의 부모님은 고향을 떠나 엘리멘트 시티로 이주를 했다. 엘리멘트 시티에 처음 온 앰버의 부모님은 도시 외곽의 파이어시티에 터전을 잡아 딸인 앰버를 낳는다. 앰버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왔다. 그러다가 물의 원소 웨이드를 우연히 만나며 앰버는 가치관의 변화를 겪게 된다.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엘리멘트 시티는, 다민족 국가인 미국을 상징한다는 걸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앰버의 부모님은 고향을 떠나 이민 온 이민 1세대이다. 앰버의 부모님은 음식도 팔고, 온갖 잡화류를 파는 잡화점을 하는데, 한국계 이민자 가정을 다룬 캐나다 드라마 김씨네 편의점이 떠오른다.
앰버의 부모님은 가족과 조상을 강조하고, 커플 궁합을 보고, 매운 음식(불의 음식)을 먹고, 다른 언어를 쓴다. 불의 원소는 아시아계인 게 명백하다. 다만, 아시아의 어느 국가인지는 분명하지 않고, 한국을 기반으로 다른 아시아 국가의 문화를 섞어서 만든 느낌이다.
앰버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웨이드는 체형이나 분위기로 봐서 백인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웨이드네 집은 부유하기까지 하다. 앰버는 웨이드네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가게 되는데, 역시 물의 원소인 웨이드의 삼촌이 앰버에게 “우리말을 참 잘한다” 며 악의가 없는 차별적인 발언을 한다. 앰버는 “저는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다”며 기분 상해한다.
이 작품의 감독은 피터 손이다. 검색을 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부모님은 한국인 이민자이고 본인은 뉴욕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이다. 성인이 돼서 미국에 커리어를 위해 온 나는, 한국인이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갖고 외국인으로서 미국에 살고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 태어난 이민 2세대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앰버가 겪은 것처럼 크고 작은 인종 차별을 겪으며 자란다고 한다. 그들 대부분은 스스로를 "아시안"이 아니라 "아시안 아메리칸"이라고 규정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앰버이지만, 나는 오히려 앰버의 부모님에게 감정 이입이 되었다. 앰버의 부모님은 고향에 폭풍우가 와서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무너져, 나머지 가족들을 두고 단 둘이 혈혈단신으로 엘리멘트 시티에 왔다. 처음 엘리멘트 시티에 도착했을 때 앰버의 부모님은 영어를 못하기에 입국 심사관과 대화가 전혀 되지 않는다. 마치 LA 공항에 처음 입국 심사관을 마주쳤던 나처럼.
사람이란 참으로 간사하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미국에 와서 공부하려고 기를 썼는데, 이제는 한국이 그립다고 운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이놈의 향수병이 왔다가 괜찮아졌다가 또 오고 이게 반복된다고 한다.
미국에 오기 전 사람들의 향수병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힘들면 왜 지가 사서 고생이야? 한국 귀국하면 되지” 이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가 막상 해보니,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커리어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미국에서 해야 한다. 특히 내가 하는 연구 분야는 아무래도 국내가 규모도 작고 일자리도 적다. 이 천조국의 연구에 대한 투자는 그 어느 나라도 비교가 안된다.
앰버의 부모님처럼 나도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다. 앰버의 부모님처럼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내 오랜 친구들은 모두 내 고향에 있다. 미국에서 새로 사귀는 친구들은 아무래도 허물없이 친해지기가 어렵다. 앰버의 부모님은 앰버를 위해 어떻게든 자리를 잡으려고 노력해서 멋진 가게를 만들어낸다. 나는 여기에 아무 가족도 없기 때문에 정을 붙이기가 힘들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했다. 물론, 나는 당연히 조국인 한국을 사랑하지 미국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미국을 알게 되니 영화가 다르게 보이고,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
앰버 아빠의 회상신에서, 앰버 아빠가 고향을 떠나기 직전, 작별의 의미로 앰버의 할아버지에게 큰 절을 하지만, 앰버의 할아버지는 그 절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 후로 앰버의 부모님은 고향의 가족들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앰버 부모님의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향수병을 겪고 있는 나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