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차를 타고 가다가 창밖으로 익숙한 듯하다가도 낯선 건물 하나를 지나치듯 보았다. 내가 저기서 밥을 먹었었나 아니면 쇼핑을 했었나 생각하다 보니 결국 생각의 끝엔 누군가를 굉장히 오래 미워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유년시절의 기억도 아닌데 이렇게 생생한 걸 보니 꽤나 열이 받았었나 보다. 나에게는 그 남자가 그랬다.
결혼하기 전 나는 수십 번의 소개팅과 맞선을 봤었다. 굳이 두 단어의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겨우 이십 대 후반이었던 나는 맞선이라는 단어가 주는 거북한 느낌을 어쩐지 지울 수 없었다. 한 번은 아는 동생이 도대체 소개팅과 맞선의 차이가 뭐냐 묻길래 친구가 주선하면 소개팅이라 부르고 집안 어르신이 소개하면 맞선이라 부르노라는 어이없는 대답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였으나 아쉽게도 그때는 이십 대 후반이면 결혼 적령기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엄마에게는 늘 과년한 딸의 혼사가 인생의 숙제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성화가 싫지만은 않았는지 내 의욕을 불살라 싫은 내색 없이 생기는 자리마다 열심히 다니던 어느 날 고모의 주선으로 또 하나의 맞선 자리가 생겼다.
수십 번의 맞선이지만 매번 최선을 다해 나를 꾸몄다. 그건 상대방과 주선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나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에 얼굴은 여드름 투성이인 그저 어디 하나 내세울 곳 없는 평범한 아가씨였다. 생전 처음 보는 두 남녀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기까지 수많은 조건이 작용하겠지만 호감 있는 외모만큼 큰 영향을 주는 게 있을까. 그날 나는 미용실에 들러 머리도 손질했다. 그러나 하필 머리가 예상보다 늦게 끝나서 급하게 택시를 타게 됐고 안타깝게도 약속시간은 십 분이나 지나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죄지은 꼴이 되었다. 거듭되는 내 사과에 남자는 기분 나쁜 내색 없이 인사를 하긴 했으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배우 신성록을 살짝 닮은 얼굴에 175cm 정도로 보이는 키, 피부가 하얀 이 남자는 공기업에 다닌다고 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나는 그에 비해 내세울만한 점이 없다. 어쩐지 그가 억지로 끌려 나왔을 거란 예감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를 나눈 지 십여분이 지났을 무렵 그가 갑자기 전화통화를 한다며 나간다. 긴장했던지라 가쁜 숨을 좀 돌리고 앞에 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는데 돌아온 그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어쩌죠? 제사가 있어서 엄마가 오라고 하네요. "
커피를 뿜을 뻔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이 맞선 보는 줄 뻔히 알면서도 제사를 핑계로 집에 들어오라고 한단 말인가. 게다가 마마보이도 아닌듯한 이 남자.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된 늦은 오후 무렵에 파스타가 맛있다는 유명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만나서는 굳이 커피 한 잔만 시킨 것도 이상했지만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옅은 냉소를 띤 그의 표정이었다. 숨기려 해도 싫은 것은 죽어도 싫은 어떤 이들은 분위기부터가 벌써 다르다. 주위 공기를 써늘하게 만드는 것이다.
제사가 급하다며 가야 한다는 사람을 붙잡기도 싫었고 그 냉소적인 표정에 나도 마음이 굳게 닫혀 흔쾌히 일어서자고 대답을 하고 나오려는데 흔한 인사말이라도 하려는지 그가 먼저 바래다 드려야 할 것 같다며 의사를 묻는다. 평소에 나 같으면 이미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 거절하며 돌아섰겠지만 분한 마음에 버스비라도 아끼고 싶었다. 급하게 오느라 타야 했던 택시비 칠천 원이 너무나 아까웠다. 쿨한 척 차를 얻어 타고 일부러 집 근처 한적한 곳에 내려 내 소식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계실 엄마에게 전화했다. 예상대로 오늘 만난 그 남자는 한참 동안 엄마의 입에서 칡뿌리 갈리듯 잘근잘근 씹혔다. 내가 차마 한마디조차 내뱉지 못할 정도로.
맞선 자리에서 이런 경우가 허다했지만 유독 이 남자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짧은 대화 시간 동안 어색함을 빙자해 한 번씩 살짝 웃는 척할 때마다 비웃음이 돌던 그 냉소적인 표정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시니컬한 성의 없던 대답도, 한모금도 마시지 않아 천천히 식어가던 그의 커피도 내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았지만 그 일관된 표정만은 생생히 기억난다. 마치 내 앞에서 나를 힐난하는 듯한 그 표정.
상처 받았을 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엄마를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전화를 끊었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쿨한 척 일어섰던 삼십 분 전의 내가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약속시간에 늦지 않았더라면 그는 다른 표정이었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결론은 역시나 같다. 그 표정이 주는 선뜩한 느낌은 생각보다 날카롭게 상처를 준다. 그는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을 표정으로 보여준 것뿐이다. 그러나 또다시 이런 상황이 와도 나는 같은 대답을 할 것이기에 입술을 지그시 한번 깨물고 만다. 거기서 분을 못 참고 물컵이라도 뿌리고 나왔다면 내 성격에 고모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을 것 같다.
예의라는 핑계로 부당한 대우를 바보같이 참고 산다고 누군가 나를 비난해도 어쩔 수 없다. 그 남자가 조금만 더 예의가 있었더라면 지금까지도 내 기억 속에 '죽일 놈'으로 각인되지는 않았을 텐데.
어느 관계에서나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 필요는 있다. 어차피 살면서 한 번이라도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 굳이 '망할 놈'으로 각인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