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의 다이어리

13만 원

by 아름다운 그레이

올해 7월부터 나는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지향하며 살고 있다. 계기는 여름휴가였다. 남편이 다니는 직장은 따로 여름 휴가비를 지원하지 않았고 가고 싶은 펜션은 숙박비용이 50만 원에 가까웠다. 여름 성수기에 우리 가정 형편으로 갈 수 있는 펜션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더운 여름날 집에만 있는 아이들이 어딘가 안쓰러워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보려고 7월 한 달만은 평소와는 다른 소비습관으로 지내보기로 작정했다. 수입이 생길 수 없는 내 입장에서 최선의 방법은 절약이었다. 일단 마음에 드는 예쁜 옷이 있어도 전혀 사지 않고 종종 사 먹던 햄버거와 간식을 줄였다. 귀찮기는 했지만 냉장고를 뒤져서 직접 요리해먹는 횟수를 늘였다. 필요한 것과 필요하진 않지만 사고 싶은 것들로 종류를 나누어 꼭 필요한 것이 아니고서는 불필요한 지출로 여겨 백원도 낭비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우리가 가고 싶어 하던 그 펜션 숙박비를 하고도 남는 돈이 수중에 남았다. 나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오로지 남편 월급에 의지해 지금까지 살림을 담당해왔지만 생활비가 남았던 달은 거의 없었다. 예쁜 옷을 보면 사고 싶어 안달이 났었고 필요할 것 같아 샀다가 애물단지가 된 물건들도 많았다. 오히려 돈을 지불하고 버려야 했을 때도 있었다. 7월 한 달을 그렇게 보낸 후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의 소비습관을 유지하며 남는 돈을 저축하며 살고 있다. 몇 년을 허무하게 날려버리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라고 위안 삼으며 늘어가는 적금을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다가 마음의 동요는 지난주에 일어났다. 우연히 '브랜드 연말 세일'이라는 달콤한 제목에 속아 클릭했다가 눈을 못 떼고 있는 나를 발견했는데 장바구니에는 이미 코트 한 벌이 담겨있었다. 정가가 39만 원이 넘는 옷이었는데 할인행사 덕에 13만 원 남짓한 돈이면 살 수 있었다. 은은한 베이지색이 단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심플한 디자인의 롱코트였다. 내 옷장엔 6년 된 남색 코트와 작년 이맘때 친구 결혼식에 입으려고 샀었던 얇은 모직코트 두 벌이 있었지만 연말이라 들뜬 기분에 뭔가에 홀린 듯이 결제 버튼을 누르고야 말았다. 6개월 만에 질러보는 나를 위한 큰 지출이었다. 그러나 그날 오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책감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롱 패딩 한 두벌로 겨울을 보내고 있는 데다 나는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옷장 안에는 이미 코트가 두 벌이나 있다. 어렵게 시작해온 미니멀 리스트의 삶은 이렇게 6개월 만에 무너지고 마는 것인가. 괴로움은 결국 주문 취소로 이어졌고 이상하게도 '취소 완료'라는 문구를 보자 내 마음은 가벼워졌다. 잠깐 동안은 13만 원에 마음이 무거운 나의 인생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13만 원은 누군가에게는 하찮은 돈이 될 테고 누군가에게는 아끼고 아껴서 겨우 만든 소중한 돈이 된다는 게 씁쓸하긴 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그 돈을 모아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둘째 아이의 책상과 의자 세트를 사주었다. 내가 만약 그 코트를 샀다면 과연 이렇게 뿌듯했을까. 돈은 어디에 의미를 두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아이는 드디어 식탁에서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며 너무나 행복해했다.

올 해의 마지막 날.

한동안 새 옷은 입을 수 없겠지만 슬프지않다.

내년에도 지금처럼 미니멀 리스트의 삶을 실천하며 살기를 다짐한다. 흔들릴지라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은 돈이지만 적금은 차곡차곡 쌓이고 있고 여전히 내 몸무게는 올해 초에 목표했던 체중을 유지하고 있다. 이만하면 올 해는 성공적이다. 내년에도 별다를 것 없는 나날이겠지만 행복은 원래 그 별다를 것 없는 일상에 스며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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