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나는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꽤 오랫동안 믿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간절한 마음으로 머리맡에 양말을 몇 켤레씩 두고 잠이 들곤 했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어제와 똑같은 모양의 양말을 보면 어린 마음에 얼마나 처참한 심경이었는지 지금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산타 할아버지를 원망할 수 없었다. 나는 툭하면 동생과 싸워댔다. 그래서 산타 할아버지가 화가 나서 그냥 지나치신 모양이라고 애써 위로하고 말았지만 어쩐지 그날은 서글픈 마음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해 크리스마스 아침이었다. 역시나 비어있는 나의 누추한 양말을 보고 나선 축 늘어진 빨래처럼 겨우 걸어 나와 아침을 먹으려던 찰나 엄마가 묘하게 웃으며 하시는 말씀이 산타 할아버지가 어젯밤 선물을 두고 갔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놀라고 기뻐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나의 바람을 들으셨구나!!
"저기 냉장고에 가 봐."
선물이 냉장고에 있다고 하니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선물이 궁금해 한달음에 달려가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 입구가 야무지게 묶인 조그만 검정 봉지가 덩그마니 놓여있었는데 만져보니 말캉했다. 두근대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천천히 열어본 봉지 안에는 아이 주먹만 한 귤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귤을 보고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산타할아버지가 나에게 겨우 이런 선물을 줄 리가 없는데....
그 후로 나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와도 더 이상 양말을 걸지 않았다. 누추한 내 양말이 아니라 금실로 짠 양말이 몇 켤레 걸렸어도 산타 할아버지는 오지 않는다는 걸 귤 한 봉지로 깨닫게 된 것이다. 너무나 슬픈 산타 할아버지와의 이별식이다. 그때의 기억이 어찌나 무참했던지 아직도 귤 담긴 검정 봉지가 선명한 사진처럼 떠오른다. 다행인 것은 나에게도 아이가 생겼고 그 아이들은 아직도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아홉 살, 일곱 살인 두 아이들은 이제 겨우 인생의 몇 분의 일 밖에 살지 않았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선물을 주는 산타 할아버지가 인생의 전부가 된다. 이 아이들에게 나는 언제까지라도 산타 할아버지가 있다는 걸 믿게 해주고 싶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즈음 나는 아이들 몰래 선물을 고르고, 포장지를 사고, 포장한 선물을 숨기느라 몸과 마음이 부산스럽다. 이 과정은 철저히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진행되어야 하므로 나는 크리스마스가 지나기 전까지는 초조하고 불안하다. 게다가 새벽녘에 자다 일어다 환희의 현장을 연출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마치 산타 할아버지가 바빠서 급히 던져놓은 것처럼 연출해야 하기 때문인데 춥고 어두운 새벽 한 시의 베란다에서 두 개의 선물을 이리저리 눕히고 세우며 연구하다 보면 이미 잠은 달아나 버리고 결국 아침이 될 때까지 선잠을 잔다. 그러나 이러한 수고로움에도 매년 즐겁게 할 수 있는 건 순전히 아이들 때문이다. 잠에서 깨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선물을 찾는 아이들의 눈빛은 매우 간절하다. 그 간절함으로 마침내 선물을 발견했을 때의 표정이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의기양양함과 설렘, 기쁨 등이 묘하게 뒤섞여 마지막엔 만개한 수국처럼 밝게 빛난다. 그 표정을 영원히 잊고 싶지 않다. 나에게 그 표정은 별똥별과 같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오래도록 행복하다.
언젠가 아이들이 나에게 산타 할아버지를 본 적 있느냐고 물었는데 안 봤다고 대답하기에는 눈빛이 너무 애절했다. 그래서 어느 늦은 밤, 화장실에 다녀오던 중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놓고 가는 뒷모습만 얼핏 봤다고 대충 이야기했는데 아이들은 마치 유니콘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더 자세히 말해 보라며 야단이었다. 아이들에게 나는 산타 할아버지를 만난 유일한 사람인 것이다. 때로는 이 믿음이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불안하기도 하다. 큰아이는 내년이면 열 살이고 벌써 또래 친구들 중에는 부모님이 산타라는 걸 명백히 아는 친구도 많을 텐데 우리 아이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너무 큰 충격은 받지 않기를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나의 산타 할아버지에게 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