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의 다이어리

쉼표

by 아름다운 그레이

알고 지낸 14년이 된 친구가 있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사회 초년생으로 어느 대형 서점 면접 자리에서 처음 만났는데 성격이 비슷했는지 금방 친해졌다. 이십 대에 만나 사십 대가 되었으니 그녀와 나는 서로의 젊음이 서서히 저물어가는 것을 지켜본 몇 안 되는 친구 중에 하나였다. 우리의 젊음은 부유하는 먼지처럼 목적도 없이 조용히 시간 속으로 흘러가다 없어지곤 했다. 다만 변한 게 있다면 그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반면 나에게는 결혼과 함께 두 아이가 생겼다는 점이었다. 내가 가정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녀와의 대화가 심드렁해진 일은 없었다. 우리는 가끔 만나 예쁜 옷과 재미있는 드라마, 동네 맛집에 대해 이야기했고 수다는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그녀 앞에서는 내 얼굴의 기미를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얼룩 묻은 티셔츠를 입고 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를 포장하기 위한 에너지를 짜내느라 힘에 부칠 일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직장을 그만두고 일상이 잠깐 무료해졌는지 언제부턴가 자주 전화를 해왔다. 불친절한 의사 이야기, 버스에서 넘어진 이야기, 가족에 대한 투정 등과 같이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가 전부였지만 언제나 그렇듯 산다는 것은 그렇게 시시콜콜함의 연속이므로 적당히 맞장구쳐주고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이런 대화도 하루 이틀의 일이라면 시들해지지 않았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내가 지쳐가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전화가 걸려왔다. 오이피클을 만들고 있었는데 휴대전화 너머 목소리가 어딘지 성난 기운이다. 티브이에 자주 나오는 심리 상담 전문가의 상담료가 지나치게 비싸다며 다짜고짜 울분을 토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고 있을 유명한 의사였다. 한참을 들어주었지만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맞장구 쳐줄 수가 없었다. 그 상담료가 터무니없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의사가 수년 동안 쌓아온 커리어에 합당하지 않냐고 되물었지만 그녀는 그런 내 물음은 안중에도 없이 돈벌이에 눈이 멀었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거두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녀에겐 들리지 않을게 뻔했다. 그래서 이번엔 다시 물었다. 광고 한 편 찍고 몇 십억씩 받는 연예인보다 낫지 않냐고. 그러자 그녀는 왜 말도 안 되는 비교를 하느냐며 짜증을 덜컥 낸다. 그녀의 짜증에 나도 기분이 상하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싸우려고 전화한 게 아니라며 그녀가 먼저 대화를 끝냈다. 그렇게 우리의 마지막 통화는 깔끔하지 못하게, 끝인사도 없이, 아주 성급히 끊어졌다. 친구 사이에도 싫증이 날 수가 있다는 것을 나는 몸소 느끼게 된 것이다.

그날로부터 석 달 여의 시간이 지났다. 그녀도, 나도 아직까지 서로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 웃으며 끝낸 통화가 아니었으므로 마음이 개운치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그녀의 전화로부터 해방되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마음을 다독였다. 문득 한 번씩 그녀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어쩐지 먼저 전화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 것이다. 그녀와 내가 숨길 것도 가릴 것도 없는 편한 사이였던 만큼 어쩌면 조금의 쉼표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편한 사이에도 더욱더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선이라는 게 있지 않았을까.

그녀와 나 사이가 마침표로 끝나버릴지 아니면 지금의 쉼표를 이어갈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이 쉼표를 걷어내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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