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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May 02. 2022

주간 영화

2022.04.23-2022.04.29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Mujeres al borde de un ataque de nervios)> (페드로 알모도바르, 1988)


처음에 펜트하우스를 내놓기로 했다가 끝내 그러지않기로 결정한 페파의 심리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이 펜트하우스는 이전과 같은 공간이 될 수 없다. 공간 자체에 달라진 점은 아무 것도 없지만, (물론 전화기가 박살 나고 침대가 불타긴 했으나 집 자체가 붕괴되지는 않았으니) 이 집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이 공간은 예전과 같은 상태로 회귀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펜트하우스가 어떤 곳이었나를 따지는 일이 매우 중요해 보인다.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을 떠올린다. 조악하다. 펜트하우스를 둘러싼 바깥 풍경은 실제보다는 인공에 가깝다. 어쩌면 연극 무대의 배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편의 멜로드라마이자 부조리극이자 스크루볼 코미디인 이 영화에서 페파는 외화 더빙 성우인 직업답게 자신의 인생을 또 다른 연기로 가공해 내고 있는 건 아닌가. 삶은 연기고 연기가 곧 삶일 수도 있겠다.


페파는 정말 임신한 걸까? 마리사는 꿈에서 누구와 섹스를 하긴 한 걸까? 어쩌면 이 모든 걸 따지는 게 큰 의미가 없는 걸까? 이 펜트하우스는 가스파초로 수면에 빠진 자들과 새롭게 잉태된 생명이 공존하는 곳이다.  정말 공존하지 않아도 좋다. 공존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곳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가운데 이곳에서 경찰은 잠들고, 난봉꾼은 발을 들이지 못한 채 쥐구멍에 숨듯 도피해야 한다. 마초적인 남성성이 사라진 자리가 무엇으로 채워져야만 하는 건가. 확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영화는 미래를 내다보려고 한다. 페파와 마리사가 뱉은 말의 진위 여부는 당장 확인할 수 없다. 그들의 말이 진실이라는 게 입증되려면, 시간이 지나야만 한다. 관객에게 이 정보들은 유보되고야 만다. 그렇게 이 펜트하우스는 결정되지 않은 미래가 털어내야 할 과거보다 더욱 중요한 존재감을 뽐내는 장소로 바뀔 수 있다.




 <귀향(Volver)> (페드로 알모도바르, 2006)


모계 사회 구성원들의 상생 혹은 연대를 과연 무엇이 지탱하고 있는가. <귀향>의 관심사는 미래로의 확장이 아니라 과거를 교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삶보다는 죽음이 연결고리로 작용하게 된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한 죽음이다. 스스로 유령이 되기를 선택한 자는 어째서 그 길로 자신을 내던져야만 했는가. 이곳의 유령은 끝내 사람으로 전환될 수 없는 걸까?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엄마의 빈자리라도 잠시나마 채울 수는 없는 걸까? <귀향>은 상실된 모계 사회의 유대가 재건되거나 회복될 수 있는지 가늠해 보고자 한다. 영화는 결국 깨닫는다. 한 번 유령이 된 자는 다시 사람이 될 수 없다. 오로지 가능한 건 찰나의 접속이다. 노래를 부르든, 거리를 좁히든, 감각의 수용도를 높일 때만 허용되는 감정들의 교환뿐이다. 이마저도 실시간의 쌍방향 소통일 수는 없다.




<오차즈케의 맛(お茶漬の味)> (오즈 야스지로, 1952)


남편이 사라진 자리. 그리고 여자들의 일탈 아닌 일탈. <오차즈케의 맛>은 <해피 아워>(2015)의 참고본이 되었을 법한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에코는 그날의 후일담을 남편이 소거된 자리에서 늘어놓는다. 남편 모키치를 흉보던 여행에서 3대 1구도를 강제로 할당받았던 다에코가 이번에는 숏 내부에 온전히 홀로 남을 수 있다. 그런데 다에코가 뱉는 대사를 떠올린다. '남자는 참 복잡해', '여보 미안해요'. 발화의 주체는 모두 다에코지만 발화의 내용은 모두 상대 지향적이다. 다에코가 나 자신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차즈케의 맛>은 사회의 거울이 될 수는 있어도 개인의 일기장이 될 수는 없는 게 아닐까.


가만 보면 영화는 급작스러운 봉합을 맞이하는 부부의 모습을 일부만 담아낸다. 오차즈케를 함께 먹었던 그때 그 일은 온전한 형태로 관객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그저 다에코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될 뿐이다.  갈등이 봉합되는 순간이 실제로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에코와 모키치만이 알고 있다. 두 사람 간 관계 회복의 속 사정은 아무에게도 공개될 수 없다. 그래서 영화는 부부의 단란한 모습을 엔딩으로 선택할 수 없게 된다. 대신 부부를 응시하는 세츠코에게 바통이 넘어간다. 가치관이 이전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듯한 젊은 남녀가 삐걱대는 결혼 생활을 이어온 사타케 부부의 삶을 반복하게 될지 안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차즈케의 맛>이 이끌어낸 화합은 그래서 반가우면서도 성급하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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