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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May 08. 2022

주간 영화

2022.04.30-2022.05.06

<여름 이야기(Conte d'été)> (에릭 로메르, 1996)


자연과 함께하는 영화들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있다면 그건 포착된 장면이 우연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대의 그 공간에서 그 바람이 그 강도로 그 방향에서 불어와 인물의 머릿결과 옷깃을 그 방향으로 휘날리게 하는 일 말이다. 이건 찰나에 포획된 어떤 우연의 산물이다. 물론 촬영된 여러 테이크가 있다고 해도, 최종 편집본으로 그 테이크가 선정된 이상 영화는 그때의 우연을 영화적 필연의 논리에 편입시킬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의 우연은 어떻게 영화가 되어 관객과 공명할 수 있는가. 사실 <여름 이야기>는 영화 내부의 세계를 현실의 관객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확장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날짜(시간)가 특정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때그때 특정 시간대를 지시하고 있지만 관객은 그것이 언제 촬영됐는지 모른다. 촬영 순서와 플롯의 순서는 같지 않을 것이다. 혹은 같지 않을 확률이 높다. 언제 촬영됐는지도 모를 해변가 혹은 카페에서의 장면들이 '7월 ○○일'이라는 지시문 뒤에 배치된 채 관객과 만날 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가스파르가 직면하는 상황들, 이 말도 안 되는 첩첩산중의 연속이 얄궂은 각본의 산물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는 영화가 계속해서 선형의 시간 변화를 관객에게 환기(강조라고 해도 좋겠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가스파르와 세 여자가 얽혀 있는 여름날의 이야기를 아주 적절한 순간마다 하루 단위로 잘라내서 관객에게 제시한다. 하루가 온전히 담기지는 않지만, 의도적으로 시간을 하루씩 흘러가게 만들고 있다. 관객은 몇 분 남짓한 각 하루의 시퀀스를 마치 이들이 실제로 보낸 하루로 여기고 영화에 빠져들게 된다. 사실 이건 일종의 착각이다. 행위 혹은 사건 등에서 비롯된 선택들이 연달아 발생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레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복되는 날짜 지시문과 수많은 컷들의 재배치가 '여름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거짓을 진실처럼 만드는 일. 더 나아가 진실같이 보이는 거짓을 곱씹으면서 그 균열 속에서 우리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일. 영화는 그걸 가능하게 만든다.




<퀵 앤 데드(The Quick and the Dead)>(샘 레이미, 1995)


떠돌이 총잡이는 왜 괴로워하는가. 청산되지 않은 빚 혹은 지워낼 수 없는 트라우마. 여기서 중요한 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던 자신을 탓하는 일이 절대 아니다. 헤로드가 엘렌의 삶을 어떻게 앗아갔는가. 가스라이팅 혹은 갑질이나 공포 정치, 뭐든 좋다. 절대자가 확립해놓은 이 게임의 룰이 지속되는 이상 변화는 없다. 유일한 탈출구는 시스템을 파괴하는 일이다. 그것을 깨부수는 순간에야 어쩌면 직시할 수 있다. 너를 죽여야만 내가 살아나갈 수 있는 이 살벌한 토너먼트장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는 잠시 도망칠까 생각하지만 한번 발을 들인 이상 매듭을 지을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퀵 앤 데드>는 자유가 박탈된 상황에서의 선택권으로 인해 인생을 망친 이의 방랑기다. 그리고 이 자가 선택권을 제한받는 상황에서 어떤 선택지를 창출해 내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Doctor Strange in the Multiverse of Madness)> (샘 레이미, 2022)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 세계의 당신은 내 예상과는 다른 존재야". 이 표현은 어딘가 이상하다. 이 말이 성립되려면 복수의 '당신'과 '세계'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라면 저 말을 뱉는 발화자 역시 복수여야만 하고,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 또한 여러 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이하 <멀티버스>)에서 아메리카 차베즈는 복수의 존재가 아닌, 단일 개체로 묘사된다. 차베즈는 차원을 넘나드는 특수 능력을 가졌고,  '내가 만난 여러 명의 스트레인지 가운데 당신은 어떠하다'라는 식으로 말을 단정 짓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유일하게 존재하는 차베즈는 서사를 서포트해 줄 뿐이고 '여러 명'이 존재하는 스트레인지와 완다가 극의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내가 아닌 다른 나와 충돌 혹은 조우하며 벌어지는 일들. 이것이 <멀티버스>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때 주체 혹은 화자로 설정된 스트레인지는 어떤 존재인가. 사실 의미 부여가 필요 없다. 우연히 수많은 스트레인지 가운데 '이쪽 세계'의 스트레인지가 극의 주체로 선정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라든가 감정과 감정이 차원을 넘어 전이되는 현상들이 인물들 앞에 펼쳐질 수 있다. 마침내 스트레인지가 크리스틴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장면. 이때 두 사람은 각자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이 세계의 경험들이 저 세계의 경험들과 교류 혹은 충돌 혹은 결합되는 순간들. <멀티버스>는 그 세계들 사이 존재하는 수많은 개체들이 만들어내는 변수를 담아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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