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0.10.09-2020.10.15

by 드플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루카 구아다니노, 2017)


화면 속의 피사체,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들이 모두 존중받는 영화이다. 매 쇼트마다 감독의 섬세한 감각으로 담아낸 인물의 동선과 행동들, 카메라 구도가 돋보인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의 생각을 말한 뒤 상대방에게 괜찮냐고, 불편하진 않냐고 묻는다. 나의 감정도 소중하고, 상대의 감정도 소중한 법이다. 원작을 각색한 제임스 아이보리가 얼마나 섬세하게 대사 구현에 신경 썼는지 잘 느껴진다.


엘리오(티모시 샬라메 분)의 주변인들은 엘리오와 올리버(아미 해머 분)의 미묘한 관계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지만, 절대 그들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엘리오와 마르치아(에스테르 가렐 분)가 친구로 남기로 한 장면, 아버지와 엘리오의 대화 신, 어머니가 엘리오를 데리고 오는 상황 등을 통해서 그러한 영화의 태도가 잘 드러난다. 영화 전반에 걸쳐 감독이 표현하려는 메시지와 대상을 향한 태도가 일관성 있게 유지되는 점이 정말 마음에 드는 영화다.


올리버는 엘리오의 혼란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엘리오가 겪을 고통과 환희, 절망을 짐작할 수 있으니까 엘리오가 상처 받지 않도록 배려해 준다. 그에 비하면 십 대 후반인 엘리오는 성 정체성이 명확히 확립되지 않았고,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며 다소 충동적이다. 영화는 그들 사이에 형성되는 미묘한 감정선에 집중한다. 영화는 절대 명쾌한 답을 제시하거나 판단하려고 들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그들을 존중하며 아름답게 담아내려고 할 뿐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틸컷



<어디 갔어, 버나뎃> (리처드 링클레이터, 2019)


인생은 혼자서 버텨낼 수 없어서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어렸을 때는 양육자를 비롯한 가족들로 시작해 성장해서는 사회 속에 섞이며 끊임없이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인간은 가끔 사회적 존재로 변모하려다 시행착오를 겪는다. 분명히 꼭 한 번쯤은 내가 아니라 나와 연결된 존재들을 위해 희생하고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불쑥 찾아온다. 관계 속의 '나'와 삶의 주체로서의 '나' 사이에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영화는 그렇게 혼란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작품이다.


버나뎃(케이트 블란쳇 분)이 오랜 동료인 폴(로렌스 피쉬번 분)에게, 엘진(빌리 크루덥 분)이 상담사 커츠 박사(주디 그리어 분)에게 품에서 썩히던 고민을 털어놓는다. 링클레이터는 두 상황을 교차 편집하여 부부간의 말 못 할 사정을 관객에게만 드러낸다. 버나뎃의 말을 듣는 폴은 엘진의 속내를 모를 것이고, 엘진의 말을 듣는 커츠도 버나뎃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서사 전개의 균형이 잡혀있는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삶이 망가져 버린 버나뎃이 점점 수렁으로 빠지는 이야기가 극의 중반부를 훌쩍 넘는 분량을 차지하고, 버나뎃이 정체성을 회복하고 자아를 치유하는 과정은 후반부에 압축적으로 제시된다. 매끄러운 템포와 서사 배분 측면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어딘가 어긋나 있다. 하지만 나는 링클레이터가 일부러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구성했을 것이라고 본다. 버나뎃이 남극에 가게 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잡는다면, 전반부에서 그녀와 주변 이웃들, 가족들이 점점 멀어지고, 어긋나는 과정이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후반부에 버나뎃이 생기를 머금고 열정을 되살려서 자아를 재생시키는 과정에서는 시공간을 잇는 장면 편집이 상당히 비약적인 템포로 이루어진다. 이는 그러한 상황에 처한 인물의 심리를 영화 구조에 반영시키려는 링클레이터의 의도된 작업이지 않을까. 기분 나쁘고, 힘들고, 지치는 일들이 찾아오게 된다면 우리는 돌파구를 찾지 못해 낙담할 때가 많다. 도대체 언제쯤 일상으로 돌아갈지, 시간은 왜 이렇게 안 가는지 막막하다. 그런가 하면 후반부의 버나뎃처럼 정답을 알게 되고, 자신감을 회복하고 전진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순조롭게 진행된다. 장애물 같은 건 보이지도 않고, 막힘없이 빠른 속도로 일이 풀려가는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결국 나는 링클레이터 감독이 인간 심리 변화와 영화적 시간을 결부시켜 서사에 반영시켰다고 본다.


<어디갔어, 버나뎃> 스틸컷



<바람이 분다> (미야자키 하야오, 2013)


<바람이 분다>는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미야자키의 영화와 여러모로 다른 작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세계에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그는 폭력과 도구화에 물든 인간 문명을 비판하고, 자연을 예찬하고 보호하려는 태도를 자주 드러냈다. 그가 다루고자 하는 것들은 현실과 환상이 기묘하게 얽혀 있는 세계를 통해 관객에게 각인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가. 왜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이 작품의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질까. 치히로가 근무하던 온천, 하울의 성이 넘나들던 세상의 다양한 모습들, 마녀 키키가 성장할 수 있었던 마을, 돼지 포르코가 벗 삼아 날아가던 하늘과 다르게 이 영화는 현실의 배경만을 무대로 삼는다. 그럼 잔혹한 현실만이 표현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주인공 지로는 꿈속에서 멘토 격인 카프로니 백작과 종종 대화를 나눈다. 현실과 환상을 의도적으로 분리한다는 점만으로도 이 영화는 지금까지의 작품과는 다르다고 어필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야자키는 이 작품에서 호텔의 독일인과 지로의 오랜 친구 혼조의 입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던진다. 의도적으로 주인공 지로는 의견 표출을 하지 않도록 배제시킨다. 지로는 꿈과 낭만을 좇다가 서서히 파멸을 맞게 되는 인물이다. 지로를 미야자키의 내면이 투영된 존재로 보자면, 본 작품에서 감독은 자신의 작품들을 지배해오던 자기모순적 세계에 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지로의 삶을 통해서 전쟁이 서서히 파멸로 이끈 한 사내의 인생을 엿볼 수 있지만, 그 씁쓸한 간극을 바탕으로 풀어가는 모양새에선 기존 미야자키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었던 특유의 입체성이 없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다각도로 조명하며 보여줬던 날카로운 진단은 어디로 갔는가. 이 영화 속 인물들은 고뇌의 흔적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한편 이런 생각도 든다. 영화의 구조 자체가 기존처럼 현실에 녹아든 환상, 환상에서 엿볼 수 있는 현실에 기반한 게 아니라 현실만을 다루기 때문에 기존 작품들과 노선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바람이 분다> 스틸컷



<버니> (리처드 링클레이터, 2011)


링클레이터가 그려낸 버니 티드(잭 블랙 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단순하게 보면 한 범죄자의 생애를 재구성한 이야기 정도로 볼 수 있겠지만, 영화가 시사하는 바는 표면의 이야기보다 훨씬 깊고 풍부하다. 링클레이터는 실존 인물을 영화로 소환했다. 영화는 페이크 다큐 형식과 유사하게 전개되면서, 스크린 속에서 실화를 기반으로 한 현실이 다시 한번 재구성된다. 선악의 경계는 불분명하고, 진실과 거짓 역시 그러하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며, 이러한 편향적 사고의 위험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버니 티드의 살인 사건을 통해 이를 드러낸다.


한편 이 영화는 관객이 자신도 모르게 인물의 심리에 동화될 수 있게 한다. 배심원들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고민하는 순간에선 영화를 보는 자신의 심리를 점검해 볼 수 있다. 감독은 실화를 가공하여 만든 이야기를 현실처럼 보이게 연출했다. 버니의 사연을 중심으로 보자면 범죄자의 선처를 바라는 호소가 얼핏 느껴진다. 마을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면 종교와 인간 사회상에 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이 엿보인다. 버니의 살인이 불가피하다며 그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마을 사람들과, 반성하는 버니, 근본적인 윤리 의식을 앞세워 버니를 심판하는 검사를 보고 있으면 이 기묘한 현상은 하나의 거대한 풍자극이다.


<버니> 스틸컷



<하나-비> (기타노 다케시, 1997)


<하나-비>를 보고 나면 삶과 죽음이 맞닿은 어딘가를 응시하고 사유할 기회가 생긴다. 니시(기타노 다케시 분)는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간다. 아이가 죽고, 부인이 병에 걸렸어도, 삶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점점 궁지로 몰려가는 와중에 오히려 주변인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기까지 한다. 겉으로는 무심한 듯, 삶에 의욕이 없는 듯 보이지만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삶을 헤쳐나간다. 그에게 삶은 어떤 의미일까. 마지막 장면에 최후를 직접 결정한다는 점으로 보면, 그는 삶의 주체로서 납득할 만한 선택을 했다. 한편으로는 의문이 든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동료에게 살아갈 명분을 주고, 아내의 심각한 병세를 알면서도 추억을 남기려고 여행을 가면서까지 살아가려는 니시가 어째서 스스로 삶을 포기한 것인가. 니시는 문득 삶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자신과 아내를 진정으로 구원할 방법은 죽음뿐이라고 어렴풋이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죽음의 순간 대신 총성만을 남기면서 사유의 공간을 냉소와 공허, 그리고 한 줌의 온기로 채운다.


감독이 연출과 편집, 각본을 모두 맡은 작품이고, 주연까지 맡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감독 자신의 일부를 녹여낸 영화로 볼 수 있다. 니시와 동료 호리베(오오스기 렌 분)는 모두 감독의 자아가 투영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니시와 호리베로 표현된 분열된 자아들의 여정과 종착지를 훑어보고 나서 감독의 작품 세계와 가치관을 바탕으로 주제의식을 바라보는 시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사운드와 영상의 조합, 배치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쓴 것처럼 보인다. 잦은 롱테이크를 동반하는 건조한 응시로 빚어낸 폭력성은 찰나의 자극 대신 씁쓸한 공허감처럼 밀려온다. 드러내려는 주제와 메시지는 강렬한 대비, 상징과 은유의 활용 등으로 집약 가능한 감독 특유의 스타일 덕분에 생생하게 다가오지만, 서사의 굴곡이 밋밋하고 갈등의 촉발과 봉합도 다소 부족해서 개인적으로 취향에 들어맞는 느낌은 아니었다. 물론 서정적이고 차분한 시선과 대비되는 과감하고 직설적인 폭력이 점철되는 독특한 분위기와 히사이시 조의 내공 가득한 음악이 단점조차도 희석시켜주는 매력이 있다.



<하나-비> 스틸컷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 https://www.theverge.com/2014/1/23/5337826/the-wind-rises-the-beauty-and-controversy-of-miyazakis-final-film


- https://thezproject.wordpress.com/2014/07/15/the-wind-rises-for-the-engineers/


- https://www.imdb.com/title/tt0119250/mediaindex?page=2&ref_=tt_mv_close


- https://www.pinterest.co.kr/pin/500110733596834277/?nic_v2=1a7bMWw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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