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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Sep 14. 2022

내몰림의 폭력 앞에서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을 되묻다

<날씨의 아이>, 신카이 마코토 (2019)

날씨의 아이 (2019)

감독: 신카이 마코토

출연: 다이고 코타로, 모리 나나, 오구리 슌, 혼다 츠바사 외

별점: 4/5

비가 그치지 않던 어느 여름날,  가출 소년 ‘호다카’는 수상한 잡지사에 취직하게 되고 비밀스러운 소녀 ‘히나’를 우연히 만난다. “지금부터 하늘이 맑아질 거야” 그녀의 기도에 거짓말 같이 빗줄기는 멈추고, 사람들의 얼굴에 환한 빛이 내려온다. “신기해, 날씨 하나에 사람들의 감정이 이렇게나 움직이다니” 하지만 맑음 뒤 흐림이 찾아오듯 두 사람은 엄청난 세계의 비밀을 마주하게 된다. 흐리기만 했던 세상이 빛나기 시작했고, 그 끝에는 네가 있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날씨의 아이>는 분명 투박한 작품이다. 시간 배분상 캐릭터의 디테일한 면모는 직접 묘사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장면 속에 스쳐 지나가게 내버려 두는 편이고, 비쥬얼과 주제의식을 위해 사소한 개연성은 포기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만큼 <날씨의 아이>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앞서 언급한 디테일함과 개연성을 일정 부분 포기하는 대신 그 시간을 이 시대 젊은이들이 내몰리는 현실을 묘사하고 그것을 가장 판타지적인 방식으로 전복하는 데 할애한다. 이는 이 영화보다 좋은 영화가 세상에는 많음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고, 또 이 영화가 기어코 21세기에 필요한 21편의 영화에 수록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는 임종을 앞둔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던 히나와 섬마을을 떠나 도쿄로 상경한 가출청소년 호다카를 각각 비추며 시작된다. 그다지 주의 깊게 보지 않아도 이들이 모두 기성세대로부터의 ‘내몰림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호다카와 히나가 각각 가지고 있는 가출청소년과 고아라는 두 특성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신카이 마코토는 이들의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이 이상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이 영화에서 그 이상의 디테일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방법론에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어쨌거나 이 지점에서 영화는 ‘내몰림을 겪고 있는 모든 청년과 청소년들’의 것이 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쿄라는 도시는 청년과 청소년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가계를 책임져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먹고사는 히나는 유흥업소 취업이라는 극단적 선택까지 고려하고 작중 언급되지는 않으나 모종의 가정사 문제로 인해 가출한 호다카는 단칸방보다도 작은 PC 카페를 전전하며 겨우겨우 삶을 버텨나간다. 이런 내몰림은 이후 등장하는 청년 나츠미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취업난에 허덕이는 오늘날 청년들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듯이 묘사된다.

이처럼 야쿠자와 빠칭코, 윤락가 등 기성세대가 만들어낸 폭력적이고 가혹한 세계로 그려지는 도쿄의 거리에서 청년과 청소년은 자꾸만 변두리로 내몰린다. 그렇기에 스가의 호다카에 대한 취업 제안과 맑음 소녀 일로 시작된 호다카와 히나가 겪은 찰나의 행복은 더더욱 값진 것이 된다. 비로소 내몰리던 이들 간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연대를 가능케 하는 것이 사실상 호다카에 대한 노동착취에 가까웠던 스가의 잡지사에서의 일, 그리고 기성세대로 인해 시작된 재난을 현세대가 책임지는 것에 다름 아닌 맑음 소녀 일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행복은 어쩔 수 없는 일시적 치유에 다름 아니다.

많은 소외된 이들에게 있어 행복은 길게 가지 않고, 이후 더 큰 불행이 겹쳐서 찾아오기 마련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이를 ‘끝없이 내리는 비’라는 하강적 이미지를 활용한 비쥬얼과 함께 너무나도 아련하게 그려낸다. 자신의 의지로 끝없는 호우라는 재난으로부터 사람들을 잠깐이나마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 시작했던 맑음 소녀 일은 히나를 제물로 대속하여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가혹한 형벌로 변질된다. 이는 실상 호의를 권리로 여기는 기성세대의 이기심에 대한 메타포로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진다. 호우는 점차 거세져가고 히나는 호다카에게 “이 비가 그쳤으면 좋겠냐”는 질문을 던진다. 호다카의 그렇다는 대답에 히나는 결국 세계를 위해 희생하기로 마음먹는다.

히나의 실종과 함께 비가 그치고 호다카는 그런 상황에 의아해한다. 그제야 그는 깨닫는다. 히나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떠나버렸음을. 여기에서부터 영화의 진짜 주제의식이 제시되기 시작한다. 이처럼 하나의 세계를 위한 그저 한 사람의 희생이 정당하냐는 질문 말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그에 대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라고 답한다. 그의 이런 태도만큼이나 숨 가쁘게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호다카는 세계와 맞바꿔서라도 히나를 되찾을 것이라 선언하고 그의 선언에 잠시나마 나기와 나츠미, 심지어는 스가까지 포함한 모든 이들이 동조한다. 혹자는 이들이 호다카의 답에 동조하는 과정에서 개연성의 부족을 논할지도 모르나 사실 이는 인간의 선의를 믿는 신카이 마코토의 마지막 바람이 영화 속에 등장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큰 무리는 없는 대목이다. 끝내 구름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발견한 히나와 호다카는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고, 그쳤던 비는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재난은 끝내 멈추지 않을 것이고, 완전히 물에 잠긴 도쿄를 보여주며 영화는 결말로 들어선다.

물에 잠긴 도쿄를 영화는 한참 동안 응시한다. 이 도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기성세대가 지금껏 만들어온 폭력적이고 가혹한, 약하고 어린 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해 온 전체주의적인 세계의 붕괴를 뜻할 것이다. 기성세대에 수긍해버린 소시민을 대변하는 스가는 그것에 대해 “세계는 원래 미쳐있었을 뿐"이라며 회의적으로 답하지만 사실 히나와 호다카는 알고 있다. 그날 그들은 세계를 바꾸었다는 것을. 다수를 위해 가장 약한 이를 희생하는 가혹한 체제를 넘어 소외되는 자들의 소소한 행복을 지키겠다고 그들은 선언했음을 말이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이러한 결말은 사실 지극히 신카이 마코토스러우면서도 이전까지의 그의 작품들과는 차이가 있다. 특히 그의 이전 작 <너의 이름은.>과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해당 작품과 <날씨의 아이>는 재난이라는 모티프와 그것의 해결을 다룬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지만 전자가 재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세계를 바꾸기 위한 적극적 투쟁을 벌이는 반면 후자는 보다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시선에서 자신들을 내버려 둔 세계 따위 자신들 역시 신경 쓰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날씨의 아이>는 캐릭터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를 하지 않기에 영화가 캐릭터성 부재와 개연성 부족이라는 논란에 시달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또 신카이 마코토 본인이 의도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작중 호다카와 히나의 캐릭터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몇 안 되는 오브젝트가 있다. 바로 히나의 초커와 호다카의 총이다. 히나는 어머니가 차고 있던 팔찌를 다듬어 초커로 만들어 작중 내내 차고 있었다. 그러나 호다카에 의해 대속물로의 희생에서 구원되는 순간 그 초커가 깨지고 만다. 보통 초커가 상징하는 구속의 의미에서 보건대 이는 자신을 감싸고 있던 사회,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호다카에 의해 해방됨을 뜻하는 듯하다. 한편 호다카는 쓰레기통에서 야쿠자들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총을 발견하는데, 이 총은 작중에서 단 두 번 사용된다. 중요한 것은 그 두 차례가 모두 폭력적인 세계로부터 자신과 히나를 방어하기 위한 때였다는 것이다. 이 두 상징물들은 호다카와 히나가 공유하게 되는 깊은 유대감, 그리고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영화가 완전히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 영화의 메인 테마곡이라고도 할 수 있는 래드 윔프스의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을까?”가 흘러나온다. OST의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은 사실 영화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 신카이 마코토는 가혹하고도 폭력적인, 전체주의적인 세계 속에서 짓밟히는 개인들의 소소한 가치, 특히나 사랑에 대한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수단으로써 기존의 전체주의적 세계가 붕괴하고 작은 이들만의 작고 보잘것없는 사랑이 살아남았다는 영화의 결말은 호불호가 갈리겠으나 어찌 보면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는 오직 사랑하는 자들만이 살아남는 세상을 꿈꾸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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