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나이트>, 데이빗 로워리 (2021) 리뷰
그린 나이트 (2021)
감독: 데이빗 로워리
출연: 데브 파텔, 알리시아 비칸데르, 조엘 에저튼, 사리타 초우드리 외
별점: 5/5
크리스마스 이브,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앞에 나타난 녹색 기사, “가장 용맹한 자, 나의 목을 내리치면 명예와 재물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단, 1년 후 녹색 예배당에 찾아와 똑같이 자신의 도끼날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아서왕의 조카 가웨인이 도전에 응하고 마침내 1년 후, 5가지 고난의 관문을 거치는 여정을 시작하는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돌아올 성탄절을 기대하라며 잘린 목을 들고 녹색의 예배당으로 돌아간 그린 나이트는 결국 ‘우리’의 목을 베었을까? 영화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중요한 것은 수차례의 연속된 실패였던 모험을 거치는 과정에서 가웨인은 조금이나마 성장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도 여기에 있을 것이며 원작 <가웨인과 녹색 기사>와 가장 크게 궤를 달리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데이빗 로워리는 바로 이 약간의 서사 비틀기를 통해서 자칫 뻔한 고전 소설적 플롯에 머무를 수 있었던 이야기를 이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시네마로 탈바꿈시킨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혹여나 모르시는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도 이 영화의 원작인 <가웨인과 녹색 기사> 이야기를 간략하게나마 하지 않을 수 없겠다. <가웨인과 녹색 기사>는 아서 왕 전설에 수록된 한 편의 이야기로, 여기에서 크리스마스 게임과 그린 나이트 등의 모든 사건은 원탁의 기사들을 시기한 마녀 모건 르 페이의 시험으로 밝혀진다. 원작에서 그린 나이트의 정체는 가웨인이 머물던 성의 성주인 베르틸락 경이었으며, 그는 가웨인이 그저 삶을 사랑한 것일 뿐이라며 그를 비난하지 않고 살려준다. 즉, 고전적 관점에서 이 원작의 이야기는 강철로 무장한 강인한 기사 내면에도 존재하는 약한 면모에 대한 것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기사도 정신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필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고전을 개작하는 로워리의 고민도 여기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시네마란 서사로써 응하는 ‘시대의 부름’인 탓이다. 때문에 그는 오히려 반대의 길을 걷기로 한다. 인간 내면의 약한 면모를 연민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고 성장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길을 묻는 것 하나에도 합당한 대가를 요구하고 그러한 요구에 몇 푼의 동전으로 보답하는, 기사도가 해체되고 물질주의가 만연한 사회를 배경으로 설정한 로워리는 그 광활한 무대에서 가웨인의 성장기를 그리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성장의 여정에서 가웨인을 가로막는 것이 다름아닌 그 자신의 업보라는 것이다. 찰나의 무용담과 명예를 위해 그린 나이트의 목을 베어 버렸던 그 업보 말이다. 로워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녹색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해 영화의 서사를 단순히 가웨인과 그린 나이트의 관계를 넘어선 한 편의 우화로 구축한다. 이렇게 영화는 14세기 고전 소설의 영웅 설화 플롯을 21세기 기후 위기에 대응시킨다. 생태주의적 애티튜드를 담은 시네마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다시 첫 문단으로 돌아가서, 글의 첫 번째 문장을 보자. 그린 나이트는 결국 ‘우리’의 목을 베었을까? ‘우리’? 그가 참수하려 한 것은 똑같이 자신의 목을 벤 가웨인의 목이었는데 나는 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가웨인과 그린 나이트 간의 관계가 내포하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메타포 때문이다. 작중 그린 나이트는 나무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땅에 풀을 돋게 하는 등 자연을 형상화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이런 그를 한순간의 명예를 위해 참수해버리는 가웨인의 모습에서는 무분별한 산업화를 자행한 인류의 그림자가 오버랩된다. 1년이 지나 이제 그린 나이트가 똑같이 그를 참수하리라는 예언 역시 산업화의 말로로써 인류에게 주어질 재앙을 나타내는 듯하다. 다른 캐릭터들 또한 마찬가지다. 분명 아서 왕 전설을 원작으로 하는 본작이지만 작중 가웨인을 제외한 다른 왕과 왕비, 기사들은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으며 작중 초반에는 가웨인이 아서 왕의 그 유명한 검, 엑스칼리버를 사용하기까지 하지만 이 검에 대한 묘사조차 이뤄지지 않는다. (심지어 이들은 엔딩 크레딧에서도 이름이 아닌 ‘왕’, ‘왕비’ 등으로만 표기된다.) 이는 이 이야기가 더 이상 아서 왕 전설이라는 갈래에서 묶이지 않으며, 오히려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블랙코미디 우화에 가깝다는 것을 은유한다.
가웨인이 그의 업보를 되받아내기 위해 겪는 여정은 또 어떤가. 그가 겪는 고난과 역경은 모두 무한한 대자연 앞에서 인류와 문명의 유한성이 겪게 되는 재난과 같은 형식을 드러낸다. 강도에게 사로잡혔을 때, 그는 무성한 푸른 수풀 속에서 백골이 되어 썩어가는 자신의 환상을 본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약한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그는 절벽을 걷다가 미끄러져 부상을 입기도 하고, 도움의 손길이라고는 없는 숲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거대한 거인들과 조우하고 그들에게마저 도움을 구걸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내몰린 그를 응시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무한성 앞에서 두려움에 떨 의지마저 상실한 코즈믹 호러를 연상케 한다. 이러한 여정의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하게 되는 장치 중 하나가 바로 그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녹색의 허리띠이다. 작중에는 녹색에 대한 언급이 한 차례 등장하는데 “녹색은 생명의 색이며 동시에 부패의 색이다”라는 맥락에서였다. 실패만이 가득하고 자신의 업보에 대해 책임조차 질 수 없을 정도로 지친 가웨인에게 생명을 보존해준다는 녹색의 허리띠는 아이러니하게도 부패의 상징으로 작동한다. 그는 그 허리띠를 차고서 그린 나이트와 다시금 조우하고,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결국 참수를 거부하고 도주한다. 그렇게 평생토록 허리띠를 차고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한 가웨인이지만 그의 내면은 누구보다도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끝내 그는 인정과 기사도가 완전히 붕괴한 세계에서 재앙과도 같은 최후를 앞두고 허리띠를 풀어 스스로의 목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의 환상이었다는 점이 드러나는 대목이 압권이다. 그린 나이트의 앞에서 비로소 정신을 차린 그는 비로소 성장하여 허리띠를 스스로 내려놓는다. 생명을 논하며 부패를 일삼는 인간이 아닌 자기 자신의 업보를 똑바로 바라보고 성찰하는 한 명의 주체로서 재탄생하는 것이다. 로워리는 바로 이 결말 비틀기를 통해 시네마가 사회에 주어야 하는 모든 것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바로 ‘희망’을 주는 일 말이다. 강도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이 아이러니를 일으키던 극 초반의 대사처럼, 희망은 작중에서 ‘작은 친절’처럼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성장하여 자신의 책임을 똑바로 바라보게 된 가웨인을 그린 나이트는 끝까지 벌했을까? 이 영화의 열린 결말은 기후위기의 시대에서 오늘날의 가웨인인 바로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있을 것이다. 로워리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이 아니면 너무 늦을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