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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Sep 10. 2022

함께라는 환상 속의 새 시대를 응시하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이와이 슌지 (2001)

릴리 슈슈의 모든  (2001)

감독: 이와이 슌지

출연: 이치하라 하야토, 오시나리 슈고, 아오이 유우, 이토 아유미 

별점: 4.5/5


'릴리 슈슈' 노래를 너무나 사랑하는 열네  소년 유이치. 그러나 그의 일상은 힘들다. 둘도 없는 단짝 친구 호시노가 어느   아이들의 리더가 되어 자신을 이지메 시키고 첫사랑 쿠노 역시 이지메를 당하지만 그녀를 도와주기에는 자신의 슬픔을 감당하기에도 벅차다. 소년의 유일한 안식처는 오로지 영혼을 뒤흔드는 듯한 ‘릴리 슈슈 노래뿐그러나 현실은 노래로 감출 만큼 만만하지 않다. '릴리 슈슈 클럽의 운영자 유이치는 더욱 고달파지는 일상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클럽 운영에  적극적으로 임하기 시작한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1세기의 도래가 가져온 가장  변화  하나는 인터넷의 대중적 보급일 것이다. 인터넷은 우리를 멀리 있는 이들과도 쉽게 소통할  있게  주었으며,  누군가와 '함께 있다' 생각을 우리에게 심어주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1세기 , 진정으로 인터넷이 우리에게 타인과의 원활한 소통의 창구가 되어주었는가? 오히려  반대는 아니었던가? 인터넷의 보급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 간의 소통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던가? 이번에 살펴볼 영화인 <릴리 슈슈의 모든 > 그런 인터넷 초기 세대의 청춘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대 청춘들의 서글픈 성장 이야기이자 동시에 그들이 성장할 토양이 지극히 줄어버린 21세기에 대한 안타까움의 기록 말이다.

영화는 PC 통신을 연상케 하듯 유니코드가 언어로 변환되는 자막들의 나열과 함께 시작된다. 게시판에 쓰이고 있는 글들로 보이는 자막은 '릴리 슈슈'라는 뮤지션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으며, 끝에는 작성자의 아이디 혹은 닉네임이 표기된다. 릴리 슈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모여 이야기를 나눌  있는 온라인 공간인 릴리 슈슈 필리어에서 사람들은 릴리의 음악과 그것이 내뿜는 바이브를 뜻하는 '에테르' 통해 치유받는다. 이곳에서 '필리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사이트의 회장 하스미 유이치는 새로 들어온 회원이자 어느덧 자신과  상에서 유일하게 교감하는 상대가  닉네임 아오네코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는다. 비록 하스미의 현실은 지속적 이지메에 노출되고 일상적으로 폭력을 겪는 지옥 같은 것이지만, 그럴수록 그는 릴리 슈슈 필리어라는 그만의 도피처로 도망칠 뿐이다.

이런 작중 초반 분위기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하스미 주위 어른들이 세태에 보이는 반응이다. "요즘 아이들은 이해할  없다" 맥락의 말을 종일 습관처럼 내뱉는 그들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해 보이기까지 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작중 초반의 시간적 배경이자 영화가 개봉한 연도가 21세기의  1년이  지난 2001년이라는 것이다. , 이러한 어른들의 대사는 이와이 슌지가 바라본 21세기를 작가 본인이 서술한 것과도 유사하다고   있다. 짐작컨대 그는  시대를 대화가 단절되고 사람들은 서로 뭉치지 않고 파편화되어 사회에서는 자꾸만 삐걱이는 마찰음이 나는 음울한 시대로 판단한 듯하다.

그런 세계 속에서 1990년대 후반 급격히 대중음악 씬의 헤드라이너  뮤지션으로 부상한 릴리 슈슈의 음악, 그리고 그의 에테르는 팬들에게 있어 마지막 남은 세기말의 자의식과도 같은 것일 테다. 말하자면 이들은 세계가 이토록 파편화되고 어지러워지기 이전으로의 복귀와 이미 망가진 몸과 마음의 치유를 원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런 릴리 슈슈의 팬들에게도 아이러니한 면모가 있다. 에테르를 통한 구세기적 구원과 치유를 원한다는 이들이 그런 자신들의 소통을 위해 고안해낸 창구가 지극히 21세기적이고 파편화된 방식인 인터넷 공간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이런 20세기와 21세기의 대비는   초반 하스미가 겪는 이지메와 같은  가지 에피소드가 지난  하스미가 과거를 회상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20세기의 마지막을 지나고 있던 중학교 1학년, 13살의 하스미는   현재의 시점에서 그를 이지메하는 주동자인 호시노와 원만한 친구관계로 지내고 있었다. 호시노는 쾌활한 성격의 모범생이었으며 이들을 비롯한 몇몇 클래스메이트들은 함께 어울려 다니며 비행과는 거리가  따스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친목도모를 위해 떠난 오키나와 여행(이마저도 결과적으로 남의 돈을 훔쳐서 떠난 여행이라는 점에서 21세기적 타락에 대한 전조이자 복선이라고  수도 있다.)에서 호시노가 죽은 자의 시체를 보고 청새치에 부딪혀 죽을 뻔한 경험을  이후로 모든  달라진다. 여행에서 돌아온 호시노는 폭력적이고 냉혈한 인물로 하루아침에 변해 있었다.

작중 호시노의 캐릭터가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크게 변하는 정확한 이유는   없다. 오키나와에서 들은 전설처럼 그가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한 순간 영혼을 오키나와에 내버리고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부잣집 도련님이던 그가 부모님의 공장이 망하고 서민으로 나앉은 것에 충격을 받아 비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격변의 지점, 하스미의 말을 빌리자면 "세계가 잿빛으로 변한" 시점이 21세기를 코앞에  1999 9 가을 학기의 시작 시점이라는 점은 매우 징후적이다. 하루아침에 달라지게  달력의   숫자처럼, 세상은 순식간에 변해버렸고 호시노가 주도하는 이지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하스미와 주위 급우들의 삶은 지옥이 된다. 호시노는 하스미  명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여학우 츠다에게는 원조교제를 강요하고 자신이 초등학교  좋아했으며 현재는 하스미가 짝사랑하고 있는 여학우 쿠노를 부모님이 운영하던 폐공장으로 불러들여 성폭행한다. 이는 소통의 가능성이 사라진 21세기라는 관점, 그리고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해버린 호시노라는 캐릭터의 관점에서   타인과의 관계 맺음을 시도하려는 가장 폭력적인 방식의 발현으로 보인다. 호시노는 누구와도 소통할  없어져버린 이상한 세계에서 미쳐버린 것이다.

작중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소통의 부재라는 문제의식은 비단 청소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 내에 등장하는 어른 캐릭터들의 면모만을 보더라도 이를 쉽게   있다. 자녀의 고민은 안중에도 없다가 잘못만을 엄하게 가르치려 드는 하스미의 어머니를, 학생들의 이지메에는 관심도 없고 하스미의 성적이 떨어지는 것에만 걱정하는 척을 하는 담임교사를, 이름도 모를 소녀와 원조교제를 하는 성매수남을 떠올려보자. 이를   이와이 슌지가 바라본  도래한 새로운 세기는 모두가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시대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대화가 통하지 않는 시대에서 청춘들이 택하는 거의 유일한 안식처로 묘사되는 것이 릴리 슈슈의 음악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에테르이다. 이쯤 와서 생각해보면 에테르란 것은 모든 이들의 소통을 향한 갈망을 은유하는 듯보이기도 한다. 중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영화 속에서  가지 중요한 장면을 목격할  있는데 하스미는 물론이고 쿠노, 츠다에 심지어는 이지메의 가해자인 호시노까지도 릴리 슈슈의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정화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잠깐의 치유와 관련된 장면을 미처  보고 있기도 전에 새로운 사건이 벌어진다. 릴리 슈슈가  라이브 콘서트를 기획한 것이다. 콘서트장에서, 릴리 슈슈 필리어의 회장인 하스미는 그가 그토록 의지하고 교감해왔던 아오네코가 다름 아닌 호시노였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자신과 함께라고 생각했던 인터넷 세상 역시 그저 21세기적 단절의 상징이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콘서트를 기다리던 오타쿠  명이 서로 음악에 대해 토론을 하지만 의견 조율이 전혀 되지 않고 토론이 몸싸움으로 번졌던 장면 역시 이런 단절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결국 단절의 세기를 살아가는 이들 모두는 자신들의 도피처에서조차도 정상적으로 소통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에테르를 공유한다는 관념이 서로 간의 착각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고, 하스미는 절망한다.

 절망을 내적으로 다스리지 못한 하스미는 끝내 인파 속에서 호시노를 살해한다. 이후 어떤 이들은  행위가 에테르를 더럽힌 것이라 비난하지만 여기까지 읽어 내려온 독자들이라면   있겠듯이, 에테르는 처음부터 그런 순수의 상징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이제는 사라져 버린 구시대적 오브제  하나였을 뿐이다. 작중 언급된 대사처럼, "사람에게는 날개가 " 이미 타락해버린 하스미를 구원할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때문에  이상  구조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게 되어 버린다.


영화는 그런 하스미의 앞에 투신자살한 츠다와는 달리 살아남은 쿠노가 드비쉬의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것을 응시시키면서 끝난다. 드비쉬가 릴리 슈슈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음악가였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다분히 상징적이고 혹자는 이것이 하스미의 성장 가능성을 암시한다고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타락해버린 하스미에게 성장이란 존재할 수 없다. 때문에 이 영화는 성장 없는 성장 드라마다. 소통하지 못해 홀로 녹지에서 헤드폰을 끼고 소리칠 뿐인 하스미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안쓰럽다. 그럼에도 이와이 슌지가 영화를 모종의 열린 결말로 끝내려 시도한 것은 이제 갓 시작해버린 21세기를 지나친 비관만으로 응시하지는 않게 하려는, 관객을 위한 작은 배려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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