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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Sep 19. 2022

스크린 속에 스스로를 박제한 소설가의 슬픈 연서

<소설가의 영화>, 홍상수 (2022)리뷰

소설가의 영화 (2022)

감독: 홍상수

출연: 이혜영, 김민희, 박미소, 권해효, 조윤희, 하성국, 기주봉, 서영화 외

별점: 4.5/5

소설가가 잠적한 후배의 책방으로 먼 길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혼자 타워를 오르고 영화감독 부부를 만나고 공원을 산책하다 여배우를 만나게 되고, 여배우에게 당신과 영화를 만들고 싶다 설득을 합니다. 둘이 분식집에서 뭘 먹고, 다시 찾게 되는 후배의 책방에서 술자리가 깊어지고 여배우는 취해 잠이 드는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진실 같은 거짓'을 추구하는 세계에서 '거짓 같은 진실'만을 외치겠노라 선언한 홍상수는 기어코 스스로를 영화라는 세계 속에 박제시킨다. 새롭게 정립된 그 공간 속에서 그는 더 이상 그를 둘러싼 세계의 반응에 침묵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항변하고자 한다. 때문에 <소설가의 영화>는 26년 홍상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선언적이고 또 가장 호전적인 영화로 완성되었다. 잘 꾸며진 거짓을 논하는 예술에 지친 소설가를 자처하는 그는 사랑하는 이를 통해 비로소 투박한 진실이야말로 진정 자신에게 필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비록 그것을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을지라도. "날이 아직 밝지만, 날은 곧 저문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는 초반부 강조되는 대사처럼, 그는 그의 연인이자 뮤즈인 여배우와 함께 스스로 영화라는 '좋은 날'의 유토피아로 떠날 작정인가 보다. 그렇게 이 영화는 가장 홍상수적이지 않지만 결국 홍상수를 대표하는 영화로 남을 것이다.


1996년 이래로 총 27편의 영화를 만들어왔으나 사실 홍상수의 과거 필모그래피만큼이나 현실로부터 회피적인 영화 세계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소위 말하는 '사람 사는 얘기'와 같은 것을 찾아보기란 매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말하자면 그가 찍는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철저히 현실과 단절된, 창작하는 이들의 유아기적 도피 성향 드러냄과도 같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자유의 언덕>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어찌 보면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라 그저 영화를 찍거나 무언가를 쓰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외로움에 사무쳐 격렬히 누군가를 사랑하고자 하는 (홍상수적 관점에서의) 예술가의 초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랬던 그의 영화 세계에 변화의 전조가 보였던 것은 2015년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작업하면서부터였다. 이제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바로 그 사람, 이제는 그의 영화 세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김민희를 만나면서 말이다. 김민희와의 만남이 홍상수에게 정확히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을 기점으로 그는 비교적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통해 현실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윽고 2017년 개봉한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부터, 홍상수는 이전까지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색채의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현실과는 거리를 둔 채 초연하게 예술가의 생태를 그려내던 그가 일순 자신을 바라보는 현실세계에 대한 대답으로 영화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이전까지 홍상수 영화의 3요소라고도 볼 수 있었던 자기혐오와 자기반성, 자기 연민이라는 키워드는 보다 확장되었다. 이제 그의 영화는 이창동이 지적했던 것처럼 단순히 "먹물들이 자위하는 영화"를 넘어서 영화인으로서 자신이 가지는 한계를 성찰하고 개인의 서사를 반성적으로 털어놓는, 그러나 결코 스스로 변화할 수는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홍상수 자신의 무기력한 사적 투쟁의 발자취가 되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사랑할 자격'이라는 맥락으로 대중들에게 질문을 던진 홍상수는 <클레어의 카메라>라는 초현실주의 실험을 거친 후 <그 후>, <풀잎들>, <강변호텔> 3 연작을 통해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고 인생에 대해 묻는다. 이후 <도망친 여자>에서 외딴섬으로의 도피 혹은 유배를 겪었던 자신들에 대해 논하고 <인트로덕션>을 통해 새로운 세대로까지 시선이 옮겨간 그는 비로소 <당신얼굴 앞에서>를 통해 길고 긴, 무려 여섯 편의 '김민희 사가'를 마무리 짓고 비로소 '죽음'의 문턱에 선다. 이 죽음이란 물론 관념적 의미의 메타포로, 말하자면 끊임없이 부활하는 철학의 종언이라는 테제처럼 돌고 돌아 다시금 제 자리에 서게 되는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2022년, 다시 김민희를 주연으로 내세운 이번 작품 <소설가의 영화>가 공개되었다. 본 작은 김민희를 주연으로 세운다는 점에서는 유사해 보일지 모르나 사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부터 <인트로덕션>까지 이어지는 맥락과는 전혀 다른 유의 영화이며, 어떻게 보자면 홍상수 영화 세계의 세 번째 막이 도래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사랑하고 도피하는 예술가들의 영화를 자처하던 제1막과 스스로의 개인사를 현실에 고하는 과정으로서의 제2막,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번의 죽음을 경험한 뒤 본격적으로 영화의 세계 속으로 박제되려 한 제3막이라는 구성으로 말이다.


제1막의 작품들이 영화 속 공간을 현실과 단절된 도피의 공간으로 상정하고 제2막의 작품들이 영화를 현실에 대한 변론이라는 맥락에서 활용한 것과는 달리, <당신얼굴 앞에서>에서 삶은 물론이고 죽음까지 이해하도록 성장한 홍상수가 <소설가의 영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펼쳐낸 제3막에서 영화는 현실을 초월하고 그가 그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 유토피아적 공간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제1막의 도피와 유사해 보일지도 모르나 엄밀히 보자면 구분된다. 제1막의 도피가 마치 어린아이가 부기맨을 피하기 위해 이불로 만든 텐트 속에 숨는 행위에 비견된다면, 제3막 속 작품들에서 홍상수는 마치 영화라는 자신만의 세계에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행복한 모습 그대로를 묻어두려 하는, 자신의 초상을 박제해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려는 화가와 같은 애티튜드를 보이는 탓이다. 또한 제3막의 애티튜드는 제2막의 그것과 비교해서도 훨씬 선언적이고 호전적이다. 2막에서 홍상수가 그저 자신들을 둘러싼 반응에 답을 하는 차원에서 영화로 응수했던 반면 <소설가의 영화>에 이르러 그는 더 나아가 자신들을 시혜적 가십거리로 여기지만 실상 그보다 더한 위선을 일삼는 인물들을 직접 영화 속으로 끌고 와 그들과 자신들을 구분 짓고, 필요하다면 싸움조차 불사할 것이라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현실의 문제를 피하려 들고 그저 자신만의 세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게 위로받으려 한 과거의 홍상수 영화와 비교한다면 어마어마한 성장이라고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제 구체적인 작품 이야기를 해보자. 작중 박 감독과 그의 아내는 현실의 영화계 혹은 대중들의 시선을 그대로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온 인물들이며 주연인 소설가 '준희'는 홍상수라는 인물을, 또 길수는 김민희 그 자체를 은유한다. 준희는 제작사 눈치 때문에 하고 싶었던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못했다고 말하거나 배우 활동을 그만둔 '길수'를 시혜적으로 아쉽다고 여기는 박 감독의 모습에 불편함을 구태여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박 감독과 아내를 스크린 밖으로 밀어내어 영화라는 공간 속에서 복수한다. 또한 그는 진짜인 체하지만 가짜일 뿐인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힘이 부친다며 더는 소설을 쓰지 않는 소설가로 묘사되지만 결국 길수와 '진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하는데 이는 더 이상 그럴듯한 가짜를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투박할지언정 자신의 진심을 담은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홍상수의 선언으로 읽힌다. 후반부 등장하는 시인은 또 어떤가. 그는 준희와 길수가 영화를 찍는다는 이야기에 자신이 즉석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보겠다고 하지만 왜 자기 이야기를 당신이 만들려 하냐는 준희의 타박에 제지당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생각났다던 이야기를 시인은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이는 세련되고 젠 체하지만 실상 그토록 쉽게 잊힐 뿐인 그 많은 '가짜 이야기'들에 대한 홍상수의 조롱으로 이해된다.


비슷한 장면은 몇 가지 더 있다. 준희와 길수는 분식집에서 라면과 비빔밥을 먹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들을 창문 너머에서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어린아이와 두 번 마주한다. 길수도 준희도 실상 그가 길수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아이는 처음에는 떠나지만 다시 돌아오고 길수는 끝내 밖으로 나가 아이를 타이르고 조심히 가던 길로 보내 준다. 이는 길수 역의 여배우를 둘러싼 대중의 반응을 의식한 듯한 장면이다. 홍상수는 이제는 대중들의 날 선 반응에도 상처받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을 잘 타일러 돌려보낼 수 있을 정도로 자신도 김민희도 성장했음을 영화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 듯하다.


영화는 기묘한 편집점과 함께 흘러가는데 그 과정에서 어디부터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소설가가 찍은 단편영화의 장면인지가 모호해진다. 이는 홍상수 자신이 언제부터 여배우와 진지한 사랑을 시작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으며, 그걸 따지려는 순간 모든 것은 모호해지고 만다는 은유로도 읽힌다. 영화의 말미에서 소설가가 찍은 영화는 길수가 꽃을 꺾어다 소박한 결혼식 흉내를 내는 장면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홍상수와 여배우의 소망을 그대로 영화화한 것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실제로 이 장면에서 길수에게 말을 거는 카메라맨의 목소리는 홍상수 감독 본인의 것이다.) 이 액자식 구성의 영화 속 영화의 장면을 통해서 홍상수는 자신의 뮤즈이자 연인에게 자신은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는 연서를 바친다. "색깔은 안 나오냐" 묻는 여배우에게 작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흑백이 아닌 풀 컬러의 화면을 비춰주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물론 이들의 사랑과 진심은 많은 이들의, 어쩌면 모두의 외면을 받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찍은 촬영감독 경우와 극장 직원의 대화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진심이 통하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들이 아무도 없다고 할지라도 홍상수와 여배우는, 그들은 언제까지고 이런 거짓 같은 진실만을 말하려 할 것이고, 그 진실이 담긴 영화 속에서 그들은 박제가 되어 영원히 유토피아 속에서 존재할 것이다. "날이 아직 밝지만, 날은 곧 저문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는 초반의 대사는 좋은 날이 저물지 않는 영화라는 세계 속에서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영화는 크레딧이 올라간 뒤 영화를 보고 나온 길수를 응시하며 마무리된다. 영화라는 세계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움켜쥔 채 영원히 함께하겠지만, 어쨌거나 언젠가 영화는 끝이 나기 마련이다. 홍상수는 영화가 마무리되는 그토록 외로운 지점을 정적인 카메라로 응시하며 준희를 찾으러 옥상으로 향하는 길수를 결코 뒤쫓지 않는다. 그들이 영원히 남기려 하는 좋은 날의 유토피아는 영화 속에 있지만 결국 그들이 살아내야 하는 세계는 현실에 있음을 끝내 부정하지 못한 것이다. 길수와 준희의 진실된 이야기는 옥상에서 계속 이어질 수도, 어쩌면 영원히 이어지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언제 어떻게 마무리될지 모르는 홍상수와 여배우의 관계와도 같다. 그러나 홍상수는 영화 속에 박제된 자신들의 모습을 통해 언제까지고 영원한 좋은 날을 누릴 수 있으리라 믿으며 오늘도 카메라 앞에 선다.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끝이 나든, 이 슬픈 연서의 결말이 어떻게 나든 간에 우리는 한 가지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홍상수는 그 모든 사건들 속에서도 끝내 '영화인'이라는 정체성만은 놓지 않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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