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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Sep 21. 2022

여성 영화계의 ‘프로메테우스의 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2019)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19)

감독: 셀린 시아마

출연: 아델 에넬, 노에미 메를랑, 루아나 바야미 외

별점: 4/5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마리안느는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의 결혼 초상화 의뢰를 받는다. 엘로이즈 모르게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마리안느는 비밀스럽게 그녀를 관찰하며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의 기류에 휩싸이게 된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들의 시대에 인간의 권리를 논한 프로메테우스는 그들에게 불을 내주었다. 마찬가지로 남성 중심 영화계에서 여성들의 영화를 논한 셀린 시아마가 우리에게 건네준 이 작품은 모든 의미에서 불과 같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 후, 그는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영화를 사랑하며 내 인생을 보냈다." "나는 프레임 밖으로 밀려나는 폭력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이는 기존의 남성 중심의 영화, 예술계에서 자신을 대상화하고 착취하며 주변부로 밀어내는 시선으로 쓰인 영화들을 어쩔 수 없이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때문에 시아마는 스스로 프로메테우스가 되어 오직 여성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기로 작정한 듯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그렇기에 여성의 시선으로 다시 쓰인 예술이자 한 편의 그리스 비극이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본 여성의 시선이란 어떤 것이고 어떤 점에서 기성 예술계의 남성적 시선과 다른 것일까?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에서부터 우리는 이것에 대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영화는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와 보낸 짧은 만남이 끝나고도 시간이 꽤 흐른 현재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화방의 미술 선생이 된 그는 여성 화가들에게 초상화 그리기를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리안느와 그의 학생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마리안느는 피사체임과 동시에 화가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그들의 작업에 참여하고, 학생들은 그런 마리안느의 참여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예술을 완성한다.

이는 예술의 대상이 예술가와 동등한 위치에 서서 예술에 관여하는 것인데, 기성 예술가들이 보여왔던 예술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대부분 남성이었던 그들은 예술의 대상, 특히 여성을 자신의 피조물로만 여기고 그것을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작품을 작업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예술을 대표하는 것이 '뮤즈' 이론이고 말이다. 짐작하건대 시아마가 인터뷰에서 논한 "프레임 밖으로 밀려나는 폭력"은 이런 것을 말하는 듯하며, 그는 이런 착취적 예술에 반대하여 동등한 시선에서 다시 쓰인 예술을 옹호하려는 것 같다. 즉,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한 예술관을 극의 초반부에서부터 관객들에게 선언하고 난 후 이야기를 시작한다.

현재의 마리안느는 자신의 작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며 향수에 빠지고 그가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밀라노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브르타뉴의 외딴섬으로 온 마리안느. 그는 엘로이즈가 초상화를 위한 포즈를 잡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에 엘로이즈의 산책 친구로 위장하여 그를 관찰하며 초상화를 그려야 한다. 때문에 영화의 초반부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 함께하는 내내 그를 흘긋거리고 훑어보며 초상화를 그린다.

그러나 이런 시선은 다분히 관음적이다. 예술이 그 대상과의 교감과 사랑으로부터 나온다고 믿는 것으로 보이는 시아마의 관점에서 이런 예술은 대단히 폭력적이며 위험한 것일 테다. 물론 이처럼 관음적인 예술을 딱 잘라 '남성적인 것'이라 말할 수는 없겠으나 예술에 대한 이런 위험한 관점이 기존의 남성 중심 예술계에서 횡행해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 예술의 폭력성을 문제시하고 사랑을 통해 예술의 새로운 관점을 논하고자 하는 영화다. 마리안느가 관음을 통해 완성한 첫 초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가 화가라는 사실을 안 엘로이즈가 자신의 초상은 자신도 마리안느도 닮은 구석이 없다고 비난하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마리안느는 처음 그린 초상을 그대로 지워버리고 이번에는 엘로이즈와의 교감을 통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관음적이었던 그의 시선이 엘로이즈와 느낀 쌍방향의 사랑을 통해 지워졌기 때문이다. 포즈를 잡던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말한다. "당신이 나를 보고 있을 때, 난 누구를 보고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을 통해 마리안느는 예술가인 자신이 예술의 대상인 엘로이즈를 동등한 시선이 아닌 하나의 객체로 대상화하고 있었을 뿐임을 깨닫는다. 남성이 주가 되는 예술계에서 배척받으며 몰래 자신의 예술을 해오던 그였지만 그 역시도 기존의 남성 중심 예술관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대목이다. 그때부터 그의 그림은 달라지기 시작하고, 두 사람의 사랑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즈음에 와서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여성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내뱉기 시작한다. 외부로부터 배제된 외딴섬이라는 공간은 여성들만의 코뮨과도 같아지고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시종 소피는 여성들만의 공간에서 잠시간의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이 공간 속에서 남성은 필요하지 않으며 남성이 등장할 여지도 없다. 혹자가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면 답은 간단할 것이다. 우리는 여태껏 당연하다는 듯이 여성이 등장하지 않고 등장할 필요도 없는 영화나 이야기들을 봐오지 않았던가. 이런 여성주의적 장면들 중 가장 특기할만한 것은 소피의 임신 중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중절은 여태껏 많은 여성 영화들에서 다루어져 온 것이나 그것이 오직 여성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남성의 도움 없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 에피소드는 사뭇 다른 느낌을 가져다준다.

극의 후반부를 이끌어가는 주요 소재가 되는 오르페우스의 비극에 대한 세 사람의 토론 장면 역시 신선하게 다가온다. 오르페우스가 자신의 사명을 잊고 에우레디케가 있는 뒤를 돌아본 것에 대해 세 사람은 다른 의견을 보인다. 소피는 그가 에우레디케를 사랑했다면 돌아봐서는 안 됐다며 연인으로서의 사랑에 대해 논한다면 마리안느는 어쩌면 오르페우스가 택한 것은 에우레디케를 추억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시인으로서의 사랑에 대해 논한다. 엘로이즈는 이야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논하는데 바로 에우레디케가 돌아봐달라고 직접 말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견해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관계를 닮았다는 점에서 다분히 상징적이며, 이후로 마리안느는 몇 차례 자신을 돌아봐달라고 말하는 듯한 엘로이즈의 환영을 본다.

이러한 그리스 비극과의 비유는 극의 결말부에서 떠나는 마리안느를 향해 "돌아봐 줘"라고 말하는 엘로이즈를 통해 극대화된다. 오르페우스가 죽음의 세계라는 단절을 통해 에우레디케와의 이별을 겪었다면 마리안느가 결혼이라는, 여성들만의 공간에서 다시 현실로의 복귀라는 단절을 통해 엘로이즈와 이별을 겪는다는 점에서 이 비유는 오르페우스 비극의 여성주의적 재전유라고 볼 수 있겠다.

이외에도 영화에는 몇 가지 언급할만한 상징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제목에도 언급된 '불'에 대한 상징들이다. 작중에서 불의 상징은 총 세 차례 등장한다. 첫 번째는 첫 초상을 그린 후 그것이 불타는 상상을 하는 마리안느에게서다. 이는 관음으로 완성된 마리안느의 첫 초상화가 기존의 남성 중심의 예술관을 의미한다고 볼 때 그것을 불태우고 나아가야만 하는 여성들의 숙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두 번째는 섬마을 여성들 간의 축제에서 드러나는 모닥불이다. 여기에서의 불은 여성들 간의 연대에서 오는 생명력을 나타내는 듯하다. 마지막 세 번째는 엘로이즈의 옷에 옮겨 붙은 불씨이다. 이는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 끝나버릴 그들의 추억을 상징하는 듯하다. 또한 이 불씨를 시작으로 그들의 본격적 사랑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불타오르는 사랑의 상징 역시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프로메테우스의 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에게 불을 건네받지만 그 불꽃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분노한 제우스는 인간들로부터 불을 다시 앗아가 버린다. 시아마가 건넨 불꽃 역시 마찬가지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불타는 사랑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들이 서로를 알아가며 사랑하게 될수록 초상화는 완성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별의 시간은 다가온다. 그림이 끝날 때를 알고 있는 예술가 마리안느처럼 사랑이 끝날 때를 알고 있는 연인 엘로이즈가 있다. 그들은 서로를 추억할 그림을 나눠 가진 후 끝내 이별을 맞이한다.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요." 이별을 목전에 두고 마리안느는 말한다. 그 마지막 밤이 지나고 작중 처음으로 남성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 두 사람의 사랑의 시간은 끝이 난다. 현재로 돌아온 마리안느는 다시금 남성 중심의 예술계에서 자신을 밀어내는 폭력들을 견디며 예술을 이어가는 여성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전시회에서 딸과 함께 있는 엘로이즈의 초상을 발견한 그는 초상화 속 엘로이즈가 들고 있는 책의 페이지, 자신이 그려 준 자화상이 있는 페이지를 보고 다시금 추억에 잠긴다. 함께 연주하던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며 불같은 감정의 북받침을 느끼는 엘로이즈를 응시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아련한 이야기 속에서도 느낄 수 있다. 한 차례의 불꽃이 우리를 통과했다 지나갔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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