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 배리 젠킨스 (2016)
문라이트 (2016)
감독: 배리 젠킨스
출연: 알렉스 R 히버트, 애쉬튼 샌더스, 트래반트 로즈 외
별점: 4.5/5
마이애미를 배경으로 한 흑인 아이가 소년이 되고 청년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겪는 푸르도록 치명적인 사랑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교차성의 시대다. 세계의 그 어떤 문제도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게 없다. 인종 문제, 젠더 문제, 빈민 문제 등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은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하나로 엮였다. 영화는 그들이 서로 엮이는 지점을 검은 살결이 달빛을 받아 푸르게 변하는 그 순간처럼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그야말로 서사시의 달빛이 검은 살결을 만난 순간이다.
지난 차례 리뷰했던 <라 라 랜드>가 그리워하던 고전의 낭만은 분명 현시대에 여전히 필요한 가치이고 끝없이 돌아봐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지극히 백인 이성애자 중산층 중심의 시혜적인 시대였음 역시 부정할 수 없겠다. 실제로 흑인들의 소통의 창구로 고안된 재즈 음악이 주요한 소재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라 라 랜드>에 유의미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흑인이 역시나 컨템포러리 재즈 뮤지션인 키이스(존 레전드 분) 한 명뿐이라는 점은 꽤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젠더나 가난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말할 것 없다.
그런 점에서 <라 라 랜드>와 비슷한 시기 개봉했으며 아카데미 경쟁작이기도 했던 본 작, <문라이트>는 정확히 <라 라 랜드>의 안티테제에 있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낭만의 시대'가 다루지 않는 흑인 빈민 퀴어 소년의 성장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가 그 해의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한 것은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후 각성을 요청하는 미국 영화계의 목소리라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의 삶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세 파트로 나눠 전개한 영화는 인생이라는 굴곡을 세 편의 서사시로 아련하게 직조해내는 데 성공한다. 흑인, 빈민, 동성애자라는 세 가지의 교차되는 소수자 담론을 온연히 이야기 내에 녹여내면서 말이다.
영화는 연약하고 굼뜬 모습 탓에 '리틀'이라 조롱당하던 소년 '샤이론'이 청소년기를 거쳐 그를 진심으로 불러준 유일한 사람인 케빈을 통해 '블랙'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 직조의 과정에서 유의미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샤이론을 부르는 이름이다. 리틀이 남들에 의해 억지로 불리게 되는 경멸적인 이름이라면 샤이론은 날 때부터 그에게 당연하게 주어진 이름, 블랙은 그를 사랑하는 이에게 불리어 비로소 자신을 인정하게 되는 이름으로 표현된다. 이처럼 세 파트로 구성되는 영화는 각각 빈민(리틀), 게이(샤이론), 흑인(블랙)이라는 요소를 한 파트 한 파트가 상징하는 듯하지만 그 모든 요소들이 결국 하나로 엮어서 보아야 하는 문제임 역시 강조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변하는 샤이론의 캐릭터성을 바라보는 것이 극의 백미인데 영화를 나눈 세 파트에 따라 각각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리틀'. 유난히 내성적이고 행동이 굼뜬 소년 시절의 샤이론은 주위 대부분의 이들에게 그렇게 불린다. 그에게는 빈민으로서의 삶을 살며 겪게 되는 대부분의 고충이 존재한다. 문제는 이 고충들이 그의 흑인이자 게이라는 정체성과 겹쳐 있다는 데 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마약에 중독되어가는 어머니가 빈민으로서의 그가 겪는 고충이라면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남성성의 억압에는 빈민이라는 정체성 외에도 남성 중심적 흑인 사회라는 요소가 가미된다. 성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라는 젠더적 고충은 앞서 언급한 빈민, 흑인이라는 정체성에 엮여 한 층 배가된다. 문제는 그런 소년기를 보내는 그를 위로해줄 인물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점일 테다. 유일하게 그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어른으로 그려지는 후안 역시 그가 겪는 문제의 원인인 남성 중심 흑인 사회의 일원이자 마약상일 뿐이다. 한편 어려서부터 그를 신경 써주는 친구인 케빈의 존재 역시 아직까지 크게 중요하지는 않으나 언급될 만하다. "네가 약하게 보이니 다른 친구들에게 당하는 거"라며 용기를 가질 것을 권하는 케빈은 샤이론에게 있어 아직 온전히 깨닫지 못한 성적 지향에 대한 고민을 가져다준다. 이 시기의 샤이론은 빈민이라는 정체성을 필두로 교차되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한 문제를 아직까지는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작고 위축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위축된 태도는 2부인 '샤이론'에 이르러 해결되기는커녕 보다 심화된다. 사회적으로 주어진 이름인 '샤이론'처럼, 2부에서 그의 이야기는 그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상황에 따라 수동적으로 흘러간다. 유일한 안식처이자 유사 부자관계를 형성했던 후안은 이미 죽었고, 학교에서의 따돌림은 심해졌으며, 어머니는 마약으로 인해 일상마저 잃어버렸다. 그런 그와 대비되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앞 문단의 끄트머리에 언급된 케빈이다. 케빈은 어려서부터 그랬지만 샤이론과 유사한 정체성적 고충을 가진 인물임에도 그것을 가면을 씀으로써 철저히 숨기고 살아온 캐릭터다. 그는 사실 어려서부터 챙겨주던 친구인 샤이론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이 아닌 사회가 요구하는 이성애적 관념을 따라 사회에서 살아남는 걸 택한다. 말하는 걸로 보아 샤이론과 비슷한 가정환경을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에도 그것을 겉모습의 위축이 아니라 오히려 당당함으로 맞서고, 남성 중심의 흑인 사회에서 정상적인 인물로 살아남기 위해 강한 척을 하고는 한다. 이런 외강내유의 케빈의 캐릭터성은 영리한 것이기는 하나 그리 권장될 만한 것은 아니다. 결국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오지 못한 인물인 탓이다. 끝내 이런 지점은 2부의 절정에 달하는 지점에서 터져 나오고, 케빈은 샤이론을 괴롭히는 친구 탓에 샤이론을 배신하고 그를 공격한다. 이런 배신의 과정에서 샤이론이 느꼈을 감정은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케빈과 같은 스스로의 파괴를 통해 이 문제적인 세계에서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3부의 청년 샤이론을 만들어낸다.
마지막 3부인 '블랙'에서 샤이론은 여태껏 알아 온 후안과 케빈의 삶을 반반씩 붙여놓은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는 그가 그토록 혐오하던 마약상이 되었고, 운동을 통해 몸을 단련한 거구가 되었으며, 그릴즈와 금목걸이, 금팔찌로 치장한 흑인 남성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고충을 숨기고 가면을 쓴 케빈처럼 자신을 도려내 마음속 한 곳에 묻어두었고, 달빛에 비친 흑인의 살결은 파랗다던 후안처럼 내면에 심연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했다. 이제 그는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와 소년기-청소년기에 겪은 일련의 사건들에 매일 밤 악몽을 꾸는 청년이 되었다. 이런 그의 청년기가 2015년 즈음을 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흑인 대통령이자 오바마 케어 등의 정책을 통해 복지를 위해 애썼던 버락 오바마의 임기 말기이자 동성결혼 법제화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해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민으로서, 흑인으로서, 게이로서 샤이론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가 외면의 위축을 가리기 위해 내면을 위축시킬 것을 선택했다는 점은 매우 상징적이면서도 안타까운 일이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샤이론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 케빈은 묻는다. "넌 대체 누구야?" 그 말을 하는 케빈은 샤이론과는 달리 청년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의 삶에 대해 되묻고 이전까지 썼던 가면을 내려놓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제 그는 샤이론에게만 보이던 자신의 부드러운 면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일 수 있는 어른이 되어 있다. 그는 딸에 대한 사랑으로 거리의 삶을 정리하고 직장을 알아봤으며, 사뭇 공격적이던 자신의 성격 역시 죽인 것으로 묘사된다.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샤이론과 케빈은 정 반대로 성장한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지점이 물과 불의 상징이다. 작중에서 바다, 눈물 등 물을 상징하는 요소들은 샤이론을 치유해주는 요소들로 이용되어 왔다. 수영을 통한 후안과의 교감, 바닷가에서 케빈과 나눈 사랑이 대표적이다. 반면 물과 대변되는 불이라는 존재로써 케빈이 등장한다. "이제 네게 불을 선물해줄게"라며 샤이론에게 한 케빈의 키스는 이후 샤이론이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를 폭행하는 등 폭력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시발점이 된다. 이후 다시 만난 케빈이 불을 다루는 직업인 요리사가 되어 있다는 점 역시 상징적이다. 샤이론과 케빈의 반대되는 캐릭터성처럼 불이란 이미지는 샤이론이 이겨내야 하는 어떤 반대되는 이미지로 기능하는 탓이다. 즉, 작중에서 물이라는 요소가 불안한 세계로부터의 치유를 말한다면, 불은 아직 겪어보지 못한 불안과 분노 등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곧 샤이론의 성장이었을 테고, 2부에서 샤이론이 분노에 못 이겨 가해자를 폭행한 것은 그 때문에 자신 안에 들어온 불을 온전히 극복하지는 못한 것이다.
다시 샤이론과 케빈의 반대가 된 청년기의 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넌 대체 누구야?" 케빈의 물음에 샤이론은 비로소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택한 것이 성장이 아닌 도피였음을 깨닫는다. 아직도 샤이론은 자신 내면의 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불은 자신의 물과 만났을 때 비로소 꺼질 수 있다. 케빈을 향한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달빛 아래에서 진정한 자신의 색깔을 공유하고, 서로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몸은 성장하되 내면은 그대로이던 샤이론이 비로소 케빈이 진심으로 그를 불러주던 이름인 '블랙'으로 성장한 것이다.
달빛에 비친 흑인의 피부색이 푸르듯이, 우리의 내면에 어떤 색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지 남들은 결코 알 수 없다.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라던 후안의 말처럼, 샤이론은 자신이 원하고 또 선택한 방식으로 자신을 불러주는 이를 만남으로써 비로소 내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성장 과정이 너무나도 빠르게 전개되고 결말부에서 쉽게 다루어진다는 영화에 대한 비판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장하지 못해 온 소수자들의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이 영화가 2016년의 세계에 보낸 응원과 지지를 단순히 그런 사실만으로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바로 이 성장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문라이트>가 그 해 '최고의 영화'는 아닐지언정 그 해 가장 '필요했던' 영화 중 하나라고 필자 본인이 생각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