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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Sep 26. 2022

리부트란 그 시리즈가 왜 여전히 필요한지를 되묻는 작업

<007 카지노 로얄>, 마틴 켐벨 (2006)

007 카지노 로얄 (2006)

감독: 마틴 캠벨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에바 그린, 주디 렌치, 메즈 미켈슨 

별점: 4.5/5

아직 MI6의 평범한 요원이던 제임스 본드. 체코에서의 위험한 암살을 마치고 007로 승격된 그에게 첫 번째 임무가 주어진다. 국제 테러조직의 자금줄로 알려진 수수께끼의 인물 르쉬프의 배후를 밝혀내는 것. 마다가스카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007은 르쉬프가 몬테카를로의 ‘카지노 로얄’에서 무제한 배팅이 가능한 ‘홀덤 포커’를 통해 대규모 테러자금을 모으려는 음모를 벌임을 알게 된다. MI6의 상관 M은 제임스 본드의 위장 잠입과 자금 관리를 위해 베스퍼 린드를 파견하고, 서로의 능력을 의심하던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지만, 테러조직의 위협을 함께 겪으며 그들은 차츰 애틋한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하지만 007 때문에 신형 항공기 폭파를 통해 주가를 조작하려던 계획이 어긋나면서 테러조직의 압박으로 다급해진 르쉬프는 극비 프로젝트 ‘엘립시스’를 가동하기에 이르는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젓지 않고 흔든 보드카 마티니, 옥스포드 셔츠와 맞춤 정장, 애스턴 마틴 DB 5, 권총을  고독하고 냉혈한 킬러.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하면 떠오르는 가장 고전적이고 확고한 스타일일 것이다. 이러한 스타일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수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은 데는 이유가 있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는 장비 애호가들의 시쳇말처럼,  거대 프랜차이즈 역시 초심으로 돌아가 위의 가장 단순하고도 매력적인 스타일을 재현하는  집중함으로써 비로소 2 전성기를 맞을  있었다.

1962 <007 살인번호> (1962) 시작으로 59년째 이어지고 있는 프랜차이즈인 만큼 007 제임스 본드라는 이미지가 쌓아온 스타일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냉전 시기 출범한 모든 첩보물들이 으레 그렇듯이, 1991 소련의 패망 이후 MI6 소속으로 비밀리에 적국과 싸우는 살인면허를 가진 첩보요원이라는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끝없이 의문부호가 붙었던 것이 사실이다. 1995 냉전 종식 이후 처음 개봉한 시리즈인 <007 골든 아이> 변해가는 정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내놓으며 시리즈의 명맥을 이어가는 듯했으나 이후 시리즈는 연이은 실패를 거듭했다. 프랜차이즈의 존속을 위해 EON 본드의 모험에 대한 동기의 부족을 화려한 CG SF 상상력으로 메꿨다. 그러나 이러한 자구책은 관객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지 못했고 시리즈의 매력은 점점 쇠퇴해갔다.

이는 40주년 기념작이자 북한을 소재로 내놓은 <007 어나더 데이>에서 절정에 달했다. 설득력을 잃은 악역에 오리엔탈리즘, 인종주의적 비판까지 이어지자 대중들 사이에서는 진지하게 007 프랜차이즈의 수명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그러나 제작진의 결정은 후속작 제작의 강행이었고 어나더 데이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EON 시리즈가 다시 살아날  있는 방법은 겉치레를 제거한 클래식으로의 복귀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결정은 적중했다. 결과적으로 <007 카지노 로얄> 프랜차이즈 내에서 가장 성공적인 시리즈  하나가 되었다.

영화에 대하여 이야기하기에 앞서 앞서 언급한 시리즈의 암흑기(90년대 - 2 년대 초반) 영화들, 특히 어나더 데이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나마 하지 않을  없겠다. 007 프랜차이즈가 시리즈를 거듭하며 점점 만화 같은 연출과 SF 요소를 영화에 도입해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나더 데이의 경우 일반적인 첩보물이 아닌 블록버스터 SF 영화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정도가 심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연출 방식에 새로운 시대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레이저 빔과 투명 자동차, 인종주의 논란까지 불러온 성형 기술 묘사 등이 블록버스터 영화로서의 화려한 볼거리를 장식하는 동안 007 상징이라고도   있는 스타일은 자취를 감췄다. 그저 피어스 브로스넌의 마스크로 대표되는 능글맞은 호색한 이미지의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성만이 부담스럽게 부각되었을 뿐이었다.

내러티브의 면에서는  어떤가. 소련이라는 1세계 진영 공공의 적을 상실한 서구 사회에서 살인면허를 가진 첩보요원이 '그럼에도' 활동해야 하는 이유를 역설하는 것은 시리즈의 시네마로서의 책무와도 같았다. 그러나 작중 북한의 행적에 대한 동기 묘사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남한을 영미권의 속국으로 보는 듯한 시선과 동양에 대한 지나친 내려다봄은 덤이었고 말이다.

반면 4  개봉한  작은 여태껏 실패를 거듭하던  007 같은 시리즈가 맞나 싶을 정도로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인다. 시간 순으로 흘러가던 프랜차이즈의 타임라인을 거슬러 제임스 본드의 기원에서부터 논하기 시작하는 영화는 때문에 가장 007적이면서도 007적이지 않은 007 시리즈가 되었다. 전자의 이유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투박한 제임스 본드가 이언 플레밍의 원작  본드와 가장 유사한 이미지를 가지기 때문이고, 후자의 이유는 기존까지 완성형 주인공이었던 제임스 본드라는 인물의 기원으로 올라가 그의 성장 과정을 다루는 탓이다.

본작의 본드는 세련됐지만 투박하고, 자신감이 넘치지만 무모하며, 노련하지만 동시에 미성숙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지금껏 봐왔던 중견 요원 제임스 본드와는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본드의 성장기를 다루면서도 영화는 기존의 007 초기작들이 가지고 있던 스타일을 그대로 되돌려온다. 드미트리오스로부터 본드카의 정석과도 같은 애스턴 마틴 DB 5 따내는 상징적인 장면이 대표적이다.

영화는 또한 세월이 흘러 변한 시대에 영화를 재적용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초반부 조직원 용병을 생포하지 못하고 급기야 대사관까지 폭발시킨 본드에 대해 M "냉전 시대가 그립군"이라 말한다. 이는 예전 같았으면 영웅적 활약으로 추앙받았을 적국을 향한 군사적 알력 행사가 논란거리가 되어버린 현시대를 통감하는 것이자 동시에 세월의 무상함을 깨닫게 하는 대사라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냉전이 종식된 21세기가 배경이기에 본드와 MI6 대적하는 대상 역시 달라진다. 소련을 위시한 동구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악역들이 차지하던 자리는 주식 시장을 이용해 테러자금을 불리려는 범죄조직의 것으로 대체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세계를 집어삼킨 21세기에 걸맞은 설정 변경인 셈이다.

이러한 설정 변경은 극의 중심이 되는 무대이자 제목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카지노라는 공간에서 극대화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카지노라는 공간은 속임수가 난무하고 약육강식, 승자독식 체제의 최첨병 자본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러한 공간을 주 무대로 설정함으로써 영화는 냉전은 끝났으나 승리한 자본주의 사회는 그 자체로 좋은 곳만은 아니며, 거기에 더해 현대 사회의 질서와 규범을 깨뜨리려 드는 수많은 악인들의 존재를 각인시키고자 하는 듯하다. 계속해서 돈을 따내고 있는 본드를 게임에서 아웃시키기 위해 르쉬프의 아내가 그를 독살하려 드는 장면이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즉, 카지노는 현대 사회의 축소판이며, 영화의 악역들이란 카지노의 룰을 깨는 자들인 것이다. 카지노 시퀀스의 중반부, CIA의 조력자 펠릭스 라이터의 등장도 인상적인데 그는 테러와의 전쟁을 논하는 미국의 마인드를 상징하는 듯한 대사를 날린다. "조건은 단 하나, 르쉬프를 우리에게 넘기시오. (중략) 돈은 우리에게 중요한 게 아니오."

본작에서는 이전까지의 작품들과 달리 변화한 본드의 캐릭터성을 보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앞서 언급한 성장형 주인공으로의 변모 외에도, 영화는 소년과도 같은 바람둥이 악동이던 제임스 본드가 마음속 깊은 곳에 심연을 지닌 남자로 변하는 과정을 성공적으로 그려낸다.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베스퍼다. 그는 본드에게 있어 처음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인물이며, 동시에 다시는 그가 사랑을 믿지 못하게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본드가 르쉬프에게 고문을 받는 장면 역시 매우 징후적인데, 성기로 대변되는 남성성을 상실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끝내 고문을 견뎌낸다는 점이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이언 플레밍의 소설 <카지노 로얄> 시대에 맞춰 재해석한 부분 역시 언급하지 않을  없겠다. 당초 원작에서 소련의 스파이로 설정되어 본드에게 상처를 안긴 베스퍼는 변화한 설정에 걸맞게 애인을 인질로 사로잡혀 테러조직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비련의 주인공으로 그려진다. 또한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21세기 초의 정세를 고려해서인지 흑인으로 캐스팅된 펠릭스 라이터 역시 고무적인 성과라고   있다.

종합하자면 <007 카지노 로얄>은 시리즈를 새롭게 시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요소만을 모아놓은 수작이며, 좋은 리부트, 좋은 프리퀄의 완벽한 예시이다. 이 영화를 통해 007 프랜차이즈는 새로운 세계관으로의 확장에 한 발짜국을 들여놓게 되었고, 배우 다니엘 크레이그는 역사상 최고의 제임스 본드 후보에 일 순위로 거론될 만큼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그야말로 시대의 부응에 맞춰 이뤄낸, 훌륭한 고전의 복기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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