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브루노 뒤몽 (2021) 리뷰
프랑스 (2021)
감독: 브루노 뒤몽
주연: 레아 세이두
별점: 4/5
“진짜일까? 당신이 보는 나.” 24시간 뉴스 채널 간판스타 ‘프랑스 드 뫼르’, 그가 있는 뉴스라는 논픽션의 세계에는 픽션들이 넘쳐난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그의 세계가 무너진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프랑스'를 찍는 카메라는 결코 화면을 거시적으로 비추지 않는다. 그것은 뉴스임에도 항상 기자인 프랑스를 중심에 둔 촬영을 하고, 프랑스의 얼굴을 과도할 정도로 클로즈업한다. '사실'을 보도하는 프랑스의 모습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카메라 속에서 '진실'은 드러날 수 있는가.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바깥세상의 모습을 목도한 프랑스는 눈물 흘린다. 그의 시선이 비로소 진실을 향하고 그것과 손을 맞잡지 않는 한 그 눈물은 결코 멈출 수 없을 것이다.
레아 세이두가 연기한 주연의 이름이자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프랑스'는 모두가 예상한 것처럼 오늘날의 프랑스라는 국가를 은유하기 위한 중의적인 표현이다. 진실보다는 보도되는 사실에 주목하고 언제나 모든 뉴스를 '연출'하려 드는 기자 '프랑스 드 뫼르'의 이름은 직역하면 '죽어가는 프랑스'라는 뜻이다. 브루노 뒤몽은 이런 프랑스의 삶을 통해 영화 내내 진실을 외면하고 보도되는 '팩트'만을 중시하는 프랑스라는 국가의 모습을 풍자하고자 한다. 그런 메타포의 대표적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이 프랑스가 흘리는 '눈물'이다. 언제나 사건을 취재하던 입장이던 프랑스는 어느 날 부주의로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피해자를 만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카메라 너머의 실제 존재를 만나고, 동시에 누군가에게 '취재당하는' 입장이 된다. 이 사건 이후로 그는 뉴스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자꾸만 울게 되는데, 이 눈물에는 기자라는 공적 인물로서의 의미와 한 명의 개인이라는 사적 인물로서의 의미가 공존한다.
그가 흘리는 눈물을 한 명의 기자라는 관점에서 이해해보자. 그는 언제나 다른 인물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위치에 선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고에 휘말려 오히려 취재당하는 입장이 된 이후로 그는 자신이 그토록 감정 없이 내밀던 카메라와 마이크가 취재받고, 때로 자신의 진실을 왜곡당하기도 하는 이에게 얼마나 폭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인지를 깨닫고 만다. 프랑스는 자신의 사고를 악의적으로 보도하는 기자들에 대해 "그게 그들의 직업인데 뭐 어떠냐"는 반응을 보인다. 이는 타인의 실책을 용서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보여 왔던 위선 역시 정당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대답이다. 그는 자신이 진실을 '보도'하기보다는 '연출'하고 '왜곡'해왔음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어쩌면 그런 그가 흘리는 눈물 역시도 그가 행해온 취재만큼이나 위선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성찰로부터 나온 눈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죄책감과 그럼에도 직업상 그것을 그만둘 수 없는 무기력에서 나온 눈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자가 아닌 한 명의 개인으로서 프랑스가 교통사고로 인해 얻은 충격은 그보다도 큰 것이었다. 그는 사고를 당한 청년의 집을 찾아갔다가 자신이 취재하던 세상 이면의 진짜 세상, 진짜 프랑스의 모습을 알게 된다. 장애, 노년 실업, 청년 가장 등의 실제 사회문제들 말이다. 평소 정치나 난민, 국제 분쟁, 무력시위 등의 프랑스 내 사회 문제를 취재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을 알리는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철저히 타자화했던 프랑스에게는 그 현실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말하자면 프랑스는 현실과 가장 가까이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현실 그 자체에는 조금도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다. 앞서 우리는 그가 기자로서 카메라 앞에서 흘리던 눈물이 죄책감과 무기력의 눈물이었으리라 논한 바 있다. 그러나 끝내 '사실'과 '진실'의 괴리를 느껴버린 그는 자신의 직업이 가진 태생적 위선을 버티지 못했고, 끝내 방송계를 떠나고 만다. 이런 개인 프랑스가 퇴사 방송 막바지에 흘린 눈물은 그 의미가 보다 심화된, 어찌 보면 참회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퇴사 이후 프랑스는 무료급식소 봉사활동 등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녹록지 않다. 프랑스 최고의 방송사 기자라는 상류층으로서 프랑스가 살아가는 '현실'과 그토록 소외된 밑바닥의 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프랑스는 쉽사리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 앞에서 다시금 눈물 흘린다. 계속해서 눈물들의 의미를 되짚어 보자면 필자는 이번 눈물을 절망의 눈물이라 평하고 싶다.
이후 그는 건강을 찾기 위해 스위스의 요양원에서 얼마간을 보낸다. 그곳에서 마음이 맞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잠깐의 외도 동안 프랑스의 눈물은 멎는다. 그것이야말로 왜곡된 사실들만이 가득한 세계 속에서 그가 발견해낸 하나뿐인 진실이라 믿은 탓이다. 그러나 남자 역시 요양원에 들어간 자신을 취재하기 위해 잠입한 잡지사 기자라는 것을 알게 된 프랑스는 다시금 절망한다. 다른 것은 다 가짜일지라도 프랑스를 사랑했다는 사실만은 진심이라는 남자를 무시한 채, 프랑스는 다시 언론계로 복귀하고, 다시 카메라 앞에서 눈물 흘린다. 이 눈물은 이전과 같은 절망의 눈물이지만 이전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이제 그는 눈물 흘린 자신의 모습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좋은 연출이라 평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자신의 눈물조차 연출의 도구로 사용한다. 몇 차례의 절망을 겪은 끝에 그는 어느덧 위선과 위악이 절반씩 섞인 눈물을 흘리게 되고 만다.
이렇게 흘러가는 그의 삶은 그 이름 그대로, 죽어가는 오늘날의 '프랑스'를 꼭 닮았다. 영화는 무력시위와 난민 문제, 양극화와 해외 파병 등 작금의 프랑스가 직면한 사회 문제를 그대로 다루면서, 그 누구도 그 문제들의 진실에는, 그 문제를 직접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현실을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사람들은 뉴스에 보도되는 '팩트'들을 진실이라 믿으며 그것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실은 맨 밑바닥, 지옥 같은 삶을 직접 살아내는 사람들의 곁에 있을 따름이다. 영화 속 프랑스의 눈물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으나 그 진실을 깨달았음에도 그 무엇 하나 바꿔낼 수 없는, 언제나 거짓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모든 현대인의 무기력을 은유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영화의 말미에서, 프랑스는 가족의 죽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로 진실에는 무관심해진다. 그런 그에게 끝까지 자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항변하려는 남자는 끝없이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며 프랑스를 찾아온다. 그의 말은 프랑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실이 맞을까? 영화는 이렇다 할 정답을 내리지 않는다. 그저 이 변화 많고 불의한 세계 속에서 다시금 프랑스가 눈물 흘려야 할 이유를 논할 뿐이다. 진실은 결코 헤아려질 수 없다. 당신의 시선이 그쪽을 향하고 당신이 그의 손을 기꺼이 맞잡지 않는 한. 영화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이고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어 보는, 눈물 흘리는 '프랑스'를 응시하며 그렇게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