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가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2004)
몽상가들 (2004)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출연: 마이클 피트, 루이 가렐, 에바 그린 외
별점: 5/5
자유를 외치는 젊은이들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1968년 파리. 씨네필인 미국인 유학생 매튜는 시네마테크에서 쌍둥이 남매 이사벨과 테오를 만나 가까워진다. 부모가 휴가를 떠난 이사벨과 테오의 집에서 한 달간 지내게 된 매튜는 영화와 음악, 책, 혁명 등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누며 특별한 추억을 쌓는다. 자연스레 이사벨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 매튜, 하지만 이사벨은 테오와 떨어지려 하지 않고 세 사람의 은밀하고 특별한 관계는 계속되는데...
불나방의 날갯짓처럼 아프고도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서구에서 벌어진 마지막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68의 열기가 파리 곳곳을 뒤덮었던 그 시절, 20대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었을 베르톨루치는 그때 그 시절을 누구보다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베르톨루치의 자조와 반성이 섞인 자화상과도 같은 영화다. 이는 필자가 매튜와 테오, 이사벨 세 사람이 당대 사회와 벌이는 치기 어리고 미성숙한 태도를 보고도 그것을 조롱하거나 비웃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들은 변혁을 꿈꾸는 '몽상가들' 모두의 거울이기 때문에.
본 작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은 주인공 삼인방의 캐릭터성 배분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미국에서 파리로 건너온 유학생 매튜와 한때 혁명을 주장했으나 지금은 전향한 중산층 시인 아버지의 쌍둥이 남매인 테오와 이사벨. 이들은 각각 인간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세 축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이다. 이사벨이 예술, 즉 미를 상징한다면 테오는 혁명, 즉 선을 상징한다. 마지막으로 매튜가 상징하는 것은 현실, 즉 진리가 된다. 이들이 상호 보완할 때 사회는 진보하고 우리는 역사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에 대한 영화의 주된 내용과 결말을 보건대 베르톨루치는 68이 그다지 성공적인 혁명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기성세대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보수화 되어버린, 소위 말하는 68세대 전체에게 과거를 되돌아보고 반성할 것을 요구하는 듯하다. 이것이 이 영화가 이토록 세계에 필요한 영화가 된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우선 영화의 시작 부분을 보자. 파리 시 당국에 의해 시네마테크가 문을 닫고 시위를 벌이는 씨네필들 사이에서 이사벨은 묶이지도 않은 쇠사슬에 묶인 양 연기를 하고 있다. 이는 언제나 테오에게 의존하고 스스로 예속되고자 하는 이사벨이라는 인물의 캐릭터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실제로 영화 내내 이사벨은 테오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기껏 매튜와 단 둘이 나온 데이트에서도 혁명의 열기와 바리케이드를 보고 두려움을 느껴 집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사벨을 미, 테오를 선을 의인화한 대상으로 생각해보자면 이는 당대 유럽의 지식인들이 생각하던 예술에 대한 관념과 매우 닮아있다. 그들은 미학의 정치화를 통해 선과 미를 동일선상에 놓아야 함을 주장했으나 그것은 실상 예술을 정치(선)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야기할 뿐이었다.
이번에는 테오라는 인물을 살펴보자. 그는 쌍둥이 여동생인 이사벨을 집착하다시피 보호하려 들며 항상 그와 함께 있고자 한다. 매튜는 이른 아침 그들의 열린 방문을 슬쩍 훔쳐보았을 때 나체로 함께 잠을 자는 모습에 충격을 받기도 한다. 벗은 몸을 통해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이 나체로 함께 잠에 드는 것은 선과 미를 합일시키려는 당대 지식인들의 열망으로도 해석 가능하겠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테오와 이사벨의 관계는 돈독할지언정 전혀 건강하지는 않았다. 이는 후반부 테오가 마오주의에 심취하는 대목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매튜와 테오는 마오쩌둥과 홍위병들이 미학의 정치화를 이뤄냈는가에 대하여 이견을 보이고 살짝 다투기까지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예술을 이용하고 검열하려 한들 그러한 의식은 독재로 발전하기 십상이라는 매튜의 지적은 마오주의의 실상이 밝혀지고 이후 중국 공산당이 혁명을 배반하는 행보를 지속적으로 보인 역사적 관점에서 타당해진다.
마지막으로 매튜라는 캐릭터를 보자. 매튜는 어떻게 보면 세 주연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또 나머지 두 사람과 겉도는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대변하고 있는 것은 '진리'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베르톨루치는 아무래도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곧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헤겔의 말을 받아들이고자 한 듯하다. 즉, 매튜가 상징하는 진리는 곧 현실 그 자체이다. 매튜는 세계의 본질을 파헤치려는 철학자적인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미국인으로서 베트남전에 파병됨을 두려워하고 혁명에서의 지나친 폭력을 경계하는 등 당대 대중의 의식과도 닮은 면이 많은 인물이다. 이런 매튜의 캐릭터성을 통해 베르톨루치는 진리는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고 변혁하려는 철학자들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 사이에도 있는 것임을 역설한다. 앞서 우리는 세계의 올바른 진보와 역사의 다음 단계로의 이행을 위해서는 진-선-미의 통합이 필요함을 논한 바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매튜가 테오, 이사벨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는 하지만 결코 두 사람처럼 그들과 하나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은 그러한 합일이 68에 있어 종국에는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세 사람의 인물들은 당대 지식인들의 뜨거웠지만 지적으로도 운동적으로도 엄밀하지는 못했던 이론과 실천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성만으로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이 영화에는 너무도 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이제부터는 영화 내의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짚고 넘어가면서 이러한 것을 말하는 작업이 왜 영화가 개봉한 당대 사회에 필요한 작업이었는지를 논하도록 하겠다.
우선 테오와 이사벨의 집에 매튜가 초대받는 초반부의 장면은 보수화된 68세대에 각성을 요청하는 베르톨루치의 심리가 담긴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나이를 계산해보건대 아무래도 2차 대전과 안티파 운동을 겪었을 세대인 테오와 이사벨의 아버지는 작중에서 완전히 전향하여 시위대를 버릇없는 놈들이라 비난하는 기성세대가 되어 있다. "시는 탄원서고, 탄원서는 곧 시다."라는 문장을 썼던 시인이 말이다. 이는 오늘날의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당장 우리가 그들의 젊었을 적의 이야기를 보고 있는 68 세대가 그렇고 말이다. 젊었던 이들이 기성세대가 되며 보수화되고 이전의 혁명성을 잃는 것을 혹자는 당연한 것이라 평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베르톨루치는 그에 대한 강경한 우려를 영화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에피소드는 주연 세 사람이 고전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을 작중에서 오마쥬 하는 등 영화에 대한 장면들이다. 68은 사회의 변혁을 말하는 움직임으로 확대되기는 했으나 그 시초는 시네마를 사수하기 위한 시네필들의 움직임이었고, 그 뜨거웠던 시절을 논함에 있어 영화가 빠질 수는 없는 일이다. 베르톨루치는 젊을 적의 자신을 포함한 혁명의 구성원이었던 세대들에 자조를 표하면서도 적어도 영화라는 영역에 있어서만은 그 시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고 열정적이었던 시절임을 강조하려고 노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지금은 변절한 68 세대의 성원이라 한들 "그래도 그 시절의 시네마를 우리가 지켰다"는 자부심만은 결코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부모님이 남기고 간 돈이 떨어지자 요리도 하지 못하고 음식을 살 돈도 없어 쓰레기장을 뒤지기까지 하는 삼인방의 무능한 생활력에 대한 부분은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있기에 그냥 넘어가도록 하고, 이번에는 그들이 혁명을 대하는 방식의 변화를 살펴보자. 이 에피소드에서는 필연적으로 테오가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데, 당장 "요즘 왜 시네마테크에 오지 않냐"는 동료 시네필의 물음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그는 삼인방과의 일탈에 고무된 나머지 혁명가로서 자신이 변혁해야 할 현실에마저 등을 돌려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음을 자부하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사고방식은 결말부 화염병을 들고 전선의 최전방으로 돌진하는 영웅심리로 극단적으로 표현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이 작중 벌어지는 삼인방의 문화적, 성적 일탈 행위이다. 미술관을 질주하거나 영화의 장면들을 따라 하고, 마오쩌둥의 선집을 읽는 것까지는 우리 모두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만한 행위들 일지 모르나 서로가 보는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거나 셋이서 함께 목욕하고 성기의 털을 면도해주며, 심지어는 테오가 보는 앞에서 매튜와 이사벨이 섹스를 하는 장면 등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했을 것이다. 베르톨루치는 이런 일탈 역시 아직 혁명을 이끌기에는 미성숙했던 젊은이들에 대한 연민이라는 관점에서 그려낸다. 누구보다도 문란한 듯 말하던 이사벨이 사실 한 번도 관계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또한 후반부 이사벨이 거실에 마련한 작은 천막 역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우리를 보호해주는 작은 천막은 유아기적인 사고의 대표적인 예시가 아닌가.
그러한 일탈이 계속되던 과정에서 이들은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복귀라는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된다. 함께 나체로 잠들어있는 그들을 보고 기겁한 이사벨과 테오의 부모는 수표를 남긴 채 서둘러 집을 떠난다. 잠에서 깨 이를 깨달은 이사벨은 가스를 퍼뜨려 테오, 매튜와 함께 자살하려 하지만 갑작스럽게 시작된 시위의 최루탄이 매튜와 테오를 깨우며 영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동안 자폐적인 세 사람만의 관계를 이어가던 그들이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이사벨은 테오에게 끌려다니고, 테오는 영웅심리에 빠져 정작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매튜는 그런 그들에게 실망해 대오를 이탈해 떠난다. 끝내 마지막까지 진-선-미의 통합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영화는 시위대를 진압하러 온 전경들이 진군하는 모습을 비추며 마무리된다. 이는 68이 실패한 혁명임을 다시금 강조하려는 베르톨루치의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를 통째로 관통하는 주제는 줄곧 언급해온 자조와 반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연민 의식이다. 베르톨루치는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연민 없이는 진정한 반성이 불가능함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이 이토록 우스꽝스러운 매튜와 테오, 이사벨의 모습을 보고도 우리가 그들을 단순히 비웃거나 비난할 수는 없으며, 어떤 이는 이를 아름다운 것으로까지 보기도 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