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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Oct 01. 2022

포스트 모던과 세대론적 불안에 대한 가장 따스한 처방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다니엘스 (2022) 가이드 리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022)


감독: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출연: 양자경, 스테파니 수, 키 호이 콴, 제이미 리 커티스 외

별점: 5/5


미국에 이민 와 힘겹게 세탁소를 운영하던 에블린은 세무당국의 조사에 시달리던 어느 날 남편의 이혼 요구와 삐딱하게 구는 딸로 인해 대혼란에 빠진다. 그 순간 에블린은 멀티버스 안에서 수천, 수만의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모든 능력을 빌려와 위기의 세상과 가족을 구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스포일러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쉽고 빠르면서 합리적이기까지 한 해답을 눈앞에 두고도 굳이 어려운 길을 걸어가겠노라 선언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눈앞에 보이는 원인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누구도 제거되지 않을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함으로써 절망 앞에 맞서겠다는 이들. 그런 이들의 춤사위를 보다 보면 괜스레 눈시울이 시큰해지고는 한다. 두 명의 다니엘이 만들어낸, 현대성의 모든 것을 담아낸 바로 이 위대한 영화도 그렇다. 두 감독은 서로 단절된 세대론이 만들어낸 분열적 사회상과 포스트모던, 인간 혐오, 팩트 중심주의와 같은 오늘날의 태도들이 가지는 수많은 문제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또한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에도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냉소하거나 문제를 품은 개인을  비난하는 등의 손쉬운 선택으로 논의를 마무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현대성을 품고 창조된, 이 지극히 MZ세대적인 불안의 손을 맞잡아주고자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죠. "괜찮아질 거야"가 아니라 "괜찮아지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사실 그렇다. 근대의 산물인 이성주의에 반해서 나온 움직임이 포스트모던이라면 그걸 해소하는 방식 역시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태도를 바탕으로 영화는 세대론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유토피아에 대한 나름의 서투른 조감도를 건넨다. 그 과정에서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겹쳐지는 과거와 현재의 산물들은 덤이다. 단언컨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2022년 공개된 최고의 영화가 될 것이며, 오늘날의 현대 사회에 가장 필요한 영화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누구도 죽지 않는 세계는 불가능할지라도 누구도 '죽이지 않는' 세계는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전하면서.


다니엘 콴과 다니엘 쉐이너트 감독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우연한 기회에 이 영화의 언론시사회 티켓을 얻게 되어 며칠 전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기대를 한껏 하고 극장에 입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에에원>은 놀라울 정도로 기대치를 완벽히,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 이상으로 충족시킨 영화였다. SF적 상상력은 두말할 것 없었고 액션 등의 화려한 볼거리도 충분했다.  할리우드에서부터 홍콩 액션 영화와 왕가위, 심지어는 애니메이션까지 아우르는 오마주들에서는 두 감독의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이 한껏 드러났다. SF와 액션, 코미디를 거쳐 가족 드라마로 마무리되는 서사 역시 과잉되는 부분 없이 훌륭했다. 특히 현대성 앞에서 비뚤어져버린 신세대적 불안을 극복하겠다는 태도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완벽한 영화인 보다 큰 이유는 이렇게 따로 떼어놓고 봐도 훌륭한 스타일, 내러티브, 애티튜드가 영화 내에서 서로를 보완하는 순환의 형태를 그린다는 점에 있었다. 영화에서 오마주 되는 수많은 대중문화적 코드들은 결국 오늘날의 세대론적으로 따지면 '과거의' 것들인데, 이렇게 드러나는 스타일은 결국 영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현대성'의 문제의식을 해결하려는 태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 그런 문제의식은 자연스럽게 영화의 서사를 모두가 꿈꾸지만 결국 누구도 쉽게 주장할 수 없었던 유토피아의 희망으로 끌고 간다. 그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모두가 흘리는 땀방울이 맨 처음 언급했던 고전의 오마주와 같은 스타일로 영화 속에서 발현된다. 말하자면 스타일이 애티튜드를 뒷받침하고, 애티튜드가 내러티브를 뒷받침하며, 또 내러티브는 스타일을 뒷받침하는 트라이앵글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구성하는 세 요소가 완벽하게 맞물려 있는 영화는 최근 20년으로 눈을 돌려도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영화가 보여준 눈부신 애티튜드의 성과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앞서 필자는 오프닝에서 이 영화가 올해 최고의 영화가 될 것이며, 또 오늘날의 현대 사회에 가장 '필요한' 영화일 거라고 언급했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보여준 윤리의식이 현대인들에게 꼭 전해져야만 하는 유의 것인 탓이었다. 그런데 이 윤리가 어떤 맥락의 것인지 설명하려면 잠시 다른 영화 이야기로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2020년 이후 공개된 영화들 가운데 시대적 필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윤리적인 플롯을 자랑하던 영화는 필자 개인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 세 편 정도였다. 마이크 밀스의 <컴온 컴온>, 케네스 브래너의 <벨파스트>, 그리고 다소 뜬금없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소속이며 존 왓츠가 연출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까지.


우선 <스파이더맨>은 이전 시리즈에서 희생되어야만 했던, 다소 억울한 면이 있었던 빌런들을 '치유'함으로써 누구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 미래를 제시한다. 그 과정에서 이전까지 시리즈를 만들어간 선대 스파이더맨들의 트라우마를 극복시켜주는 등의 예우를 보이기까지 한다. 즉, <노 웨이 홈>이 보인 윤리성은 모두에게 좋은 결말을 만들어내려는 약간은 미련한 고집에서 시작되었다. 한편 60년대 벨파스트 지역을 둘러싼 성공회와 가톨릭교도 사이의 분쟁을 그린 <벨파스트>는 또 다른 의미의 윤리성을 드러낸다. 이 영화는 흑백논리와 이분법에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시네마의 무력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춤을 추며 절망과 싸우고자 했던 이들의 낙관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자 한다. 즉, <벨파스트>의 윤리성은 실패했을지언정 최선의 대안을 위해 싸웠던 과거의 이들에 대한 헌사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컴온 컴온>은 어떨까. 이 영화는 소년과 삼촌의 교감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지만 사실 21세기를 살아가며 젊은이들이 겪을 모든 불안에 대한 위로를 던지는 영화다. 특히나 후반부에 외쳐지는 "괜찮지 않은 게 정상"이라는 대사가 그것을 대변한다. 이 영화에서 윤리성은 불안의 해소란 '해결'이 아닌 '공감'에 있음을 확실히 함으로써 드러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이야기를 하다 말고 이렇게 굳이 다른 영화의 윤리성 이야기를 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놀랍게도 <에에원>이 보여준 윤리성은 저 세 편의 영화가 드러내고자 했던 윤리성의 서로 다른 측면을 모조리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노 웨이 홈>처럼 갈등 해소의 과정에서 누구도 희생되지 않기를 원해 굳이 미련한 선택을 불사하고, <벨파스트>처럼 어찌 보면 실패한 과거 세대의 인물들에게도 나름의 헌사를 보낸다. 또 <컴온 컴온>처럼 신세대의 불안에 대해 "우린 해결해줄 수 없다"라며 선을 긋는 게 아니라 그저 그들을 마주 보고 손을 잡아주고자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든 생각은 이토록 윤리적인 영화는 또 나오기 힘들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신세대적 불안은 소위 말하는 MZ 세대와 이전 세대의 단절된 관계에서 기인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현대성과 근대성 사이의 충돌이다. 이성주의, 합리주의와 같은 근대적 사고방식에 상처받은 신세대들은 포스트모던이라는 도피처로 도망친다. 그곳은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전제 하에서 모든 걸 상대화하고, 그 결과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로까지 이어지는 어찌 보면 위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그 혹은 그들은 이성과 합리성이 지켜주지 못했던,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무기를 쥐어들기 시작한다. 인간 혐오와 과도한 팩트 중심주의 등으로 무장한 그들은 누구보다도 사실관계를 중시하지만 실상 논리나 개연성과는 거리가 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들이 도피했던 대상이 바로 '합리성'과 '이성'인데, 어떻게 그들의 이야기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나?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이런 문제의식을 담은 이야기를 그려낼 때 그저 두 가지 선택만을 고려할 뿐이다. 해결 불가능을 말하며 냉소하거나, 혹은 문제가 발생한 부분만을 제거함으로써 일시적으로 해소하는 것. 근래 개봉한 영화 중에서 사례를 들자면, <헤어질 결심>이 드러낸 세계의 회생 불가능성이 전자의 사례가 되겠고, <더 배트맨>이 보인 갈등의 해소에도 불구하고 찝찝함이 남는 결말이 후자의 사례가 되겠다.


물론 이 영화들의 선택이 나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필자는 두 영화 모두 올해 최고의 영화를 꼽을 때 들어갈 정도로 대단한 작품들이라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쉽고 간편한 선택'이라는 건, 그게 성공 확률이 가장 높은 선택이라는 말이기도 하니 말이다. 다만 말하고자 했던 건, 그저 <에에원>은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뿐이다. 이 영화는 냉소와 갈등의 해소라는, 목적지가 눈앞에 보이는 두 갈래 길을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어디로 가는 건지조차 알 수 없는 제3의 길을 모색한다. 어디까지 내려갈지도 모를 심연의 끝으로 몸소 내려가서, 마치 <노 웨이 홈>의 스파이더맨처럼 불안이 만들어낸 괴물을 스스로 구원해내고자 한다. 그 구원의 주체는 마치 <벨파스트> 속 인물들과 같은 과거의 실패자들이다. 또, 그 구원의 과정에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지만 당신의 상황에 '공감'해줄 수는 있다는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마치 <컴온 컴온>처럼. 이로써 <에에원>은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가장 윤리적인 요소만으로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된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것 같기에 이만 줄이는 편이 좋겠다. <에에원>은 볼거리와 드라마, 그리고 윤리성을 모두 잡은 금세기 최고의 수작 중 한 편이다. 또 <와호장룡>과 같은 홍콩 액션 영화에서부터 <라따뚜이>, <화양연화> 등 수많은 영화적 요소들을 패러디 및 오마주하고 있는데 이런 점을 상기하고 영화를 보시는 것 역시 작품의 재미를 더해줄 것이다. 필자는 9월 29일 언론 시사를 통해 이 영화를 처음 봤지만, 여운이 너무 커서 아무래도 다음 주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또 한 번 이 영화를 보게 될 듯하다. 아무쪼록 10월 12일 개봉하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많은 관심과 관람을 부탁드린다. 또한 다음 주부터 얼마간은 부산국제영화제 특집 영상과 리뷰들로 돌아온다는 점 미리 공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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