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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Oct 03. 2022

성실이 외면받는 나라에서 희망이란 광기에 다름아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안국진 (2014) 리뷰

감독: 안국진

출연: 이정현, 이해영, 서영화, 동방우, 이준혁 

별점: 4/5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성실하게 살지만 누구도 성실한 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없는 나라는 참으로 이상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이토록 성실한 이들의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인 수남이 겪는 모험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동시에 환상적이다. 노력을 집어삼킨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은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 영화는 이 질문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나머지 리얼리즘의 세계를 떠나 판타지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말하자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성실함을 외면하는 세상에 의해 실성해버린 한 여성의 잔혹동화다.

수남의 이야기는 그가 고교에 진학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취업을 위해 최연소로 14개가 넘는 자격증을 따는 등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던 그의 미래는 예상치도 못했던 컴퓨터라는 복병에 집어삼켜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기술의 희생양이 될 수 있음이 처절하게 드러나는 구간이다. 순식간에 그의 노력과 쌓아온 스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그는 아직 컴퓨터를 들일 여력이 안 되는 작은 공장에 사무직으로 입사한다. 그나마 위안할만한 점이라면 그곳에서 사랑하는 남편을 만났다는 점 정도겠다.

그러나 이상한 나라에서는 결혼생활 역시 이상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나보다. 행복한 신혼을 즐기려는 수남과는 달리 남편 규정의 머릿속에는 온통 집을 사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아무리 성실하게 일한들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는 방법은 부동산 외에는 없는 탓이다. 이런 이상한 나라에 대해서 고민할 잠시의 틈조차 주지 않고 영화는 수남에게 소리없이 찾아오는 습격과도 같은 불행을 선사한다. 규정의 수술비로 그간 모아둔 재산을 탕진한 수남 가족의 불행은 지진과도 같아서, 규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수술의 부작용인 이명으로 인해 기계에 손가락을 잘리는 여진을 겪고 만다.

그때부터 이 이상한 나라에서 남편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한 수남의 사투가 시작된다. 규정은 남편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어떻게든 집을 사기로 결심하고, "나만 노력하면 된다"는 일념으로 9년을 일한 끝에야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다. 이상한 나라에서 노력은 더 이상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후 규정의 자살시도와 식물인간 판정을 거치며 병원비로 큰 돈을 쓰게 된 수남은 기껏 사놓은 집에는 세입자를 둔 채 고시원을 전전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럼에도 수남에게는 삶을 유지하게 하는 단 하나의 원동력을 가지고 있다. 남편 규정이 깨어나리라는 '희망'이다.

그리고 이제는 병원비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 파산 상태에 놓인 수남에게 한 줄기 희망같은 이야기가 들려온다. 자신의 집이 재개발 된다는 소식이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아닌 부동산의 천운만이 희망의 실마리가 되는 세상은 여전히 이상해보이지만 그래도 수남은 겨우 숨통을 트게 될 듯했다. 재개발이 자신의 동네로 지정되지 않음에 분노한 옆 동네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노예들은 자신의 다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한다."던 과거의 격언처럼, 이들은 이처럼 천운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는 이상한 나라를 만든 원인을 찾아내기보다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었던 행운을 남이 가져감에 분노하며 이상한 투쟁을 시작한다. 이 투쟁을 기점으로 수남의 이야기는 리얼리즘에서 한 편의 판타지로 변모한다. 그는 자신의 희망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 불사한다.

영화 속의 세상은 현실과 닮아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이상한 세상이지만, 그 중에서도 작중 특기할만한 공간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병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두가 알다시피 의사란 병든 사람이 있어야 존속할 수 있는 모순적인 직업이다. 병원과 의사들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으며 병원은 따지자면 사기업임에도 공공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이다. 그러나 영화는 과연 오늘날의 병원이 여전히 그런 공간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예컨대 규정의 주치의는 규정의 병원비가 밀려있을 때에만 지속적으로 존엄사 이야기를 꺼내고, 수남이 재개발을 통해 번 돈으로 밀린 병원비를 모두 낸 이후에는 치료 중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게 어떠냐는 태도 변화를 보인다. 이 이상한 나라에서는 인간의 생명조차도 경제적 논리로 생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실함이 외면받는 이상한 나라에서의 모험 끝에 이곳에서 희망이란 덧없음을 깨달은 수남은 결국 자신만의 희망을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스쿠터의 사이드카에 식물인간 규정을 태우고 국도를 질주하는 수남의 모습은 광기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는 어쩌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현실과도 같은 저 이상한 나라에서 희망을 갖는다는 일은 광기에 빠진다는 것과 다름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야말로 처절하면서도 가슴 아픈 비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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