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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Aug 13. 2022

밀레니엄에 바치는 핀처의 송가

<파이트 클럽>, 데이빗 핀처 (1999) 리뷰

파이트 클럽 (1999)

 

감독: 데이빗 핀처

출연: 브래드 피트, 에드워드 노튼, 헬레나 본햄 카터 외

별점: 5/5

 

비싼 가구들로 집 안을 채우지만 삶에 강한 공허함을 느끼는 자동차 리콜 심사관 ‘잭’.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거친 남자 ‘테일러 더든’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싸워봐야 네 자신을 알게 된다”라는 테일러 더든의 말에 통쾌한 한 방을 날리는 잭. 두 사람은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파이트 클럽’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고, 폭력으로 세상에 저항하는 거대한 집단이 형성된다. 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커진 ‘파이트 클럽’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미가 변질되고, 잭과 테일러 더든 사이의 갈등도 점차 깊어져 가는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리뷰는 백년의 영화 유튜브를 통해 영상으로도 감상 가능합니다.


https://youtu.be/d51RoAWcAhI


20세기 후반 이후 현대적 문명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늘상 있어왔으나 이 영화만큼이나 당대의 사회를 '이상한 것'으로 그리려 시도한 영화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주체성을 깨닫고 비로소 타일러 더든과 하나가 된 잭(물론 이는 극적 반전을 위해 감독이 영화 붙인 가짜 이름이며 작중 그의 진짜 이름은 타일러의 정체가 밝혀질 때까지 언급되지 않는다.)은 얼굴에 총상을 입은 상태임에도 가장 행복하다는 표정과 말투로 말라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우린 너무 이상한 때에 만났어." 그 이후 폭발하는 빌딩들을 비추며 막을 내리는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Y2K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실 그렇다. 금융사 빌딩을 파괴시킨다는 계획도, 대혼란 작전의 수많은 반달리즘과 블랑키주의적 테러도 모두 Y2K를 닮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파이트 클럽>은 다가올 밀레니얼에 대한 어떤 비전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핀처는 이런 질문에 비관도 낙관도 하지 않은 채 영리하게 영화를 끝맺는다. 불꽃놀이를 하기라도 하듯 Pixies의 음악에 맞춰 신나게 무너지는 빌딩 숲을 비추며 말이다. 이로써 <파이트 클럽>은 새 시대를 맞이한다는 온연한 의미의 '마지막 20세기 시네마'가 되었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타일러 더든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해보지 않을 수 없겠다. 잭 자신이며 잭이 되고 싶어 왔던 인간상이 그대로 표출된 상상의 인물인 타일러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는 진정한 자유를 손에 거머쥔 것으로 그려진다. 이는 그가 내뱉는 대사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자기 계발은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모든 걸 잃어봐야 해." "TV를 통해 우린 모두 백만장자나 스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 그게 환상임을 깨달았을 때 우린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 이처럼 타일러라는 인물은 작중에서 20세기 말 현대 문명의 병폐를 꼬집고 우리 모두가 세계대전이나 대공황보다도 심각한 '영적 공황' 상태에 빠져있음을 주장한다. 어쩌면 그런 그들의 방황과 분노가 파이트 클럽과 대혼란 작전과 같은 폭력적이고 아나키적인 방식의 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잭이라는 인물을 살펴보자. 타일러의 본모습이자 타일러라는 인물을 상상 속에서 창조해낸 잭은 타일러와는 정 반대로 이케아 가구를 쇼핑하는 게 취미이며 아파트를 꾸미고 새로운 옷을 사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등 전형적인 현대 사회 속 소시민이자 소비자적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살면 살수록 그의 내면은 오히려 죽어가고 있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깬 것도 잠든 것도 아닌 일상을 보냈고, 자신도 모르는 이상한 장소에서 깨어나기가 일쑤였다.

 

그런 그를 잠시나마 구원할 뻔했던 것이 시한부 환자들의 자조모임에 나가는 일이라는 것은 꽤나 징후적이다. "모든 걸 잃은 자만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던 타일러의 말에 대한 복선처럼 보이기도 하는 탓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의연해진 다른 환자들을 보며 그는 희망을 얻고 다시금 행복한 일상을 얻는 듯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의 죽음을 재료로 삼아 잠시간 통증을 안정시키는 진통제와 같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즈음 말라 싱어가 등장한다.

 

타일러가 아닌 잭은 언제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애써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인물이었다. 자유를 원할 때는 내적인 것을 탐하지 않고 집의 가구 따위의 물질적 풍요만을 늘려나갔고, 삶을 원할 때는 곧 죽을 시한부 환자들을 찾았다. 때문에 그가 말라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에 빠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혐오로 착각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말라는 오히려 잭의 이상향으로 스스로 만들어진 타일러와 사랑에 빠졌고 그때부터 지독히도 병적인 삼각관계가 시작된다.

 

이 삼각관계는 자칫 영화 내에서 별 것 아닌 에피소드쯤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실상 매우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것이다. 말라를 자신의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하고 버리려 드는 타일러와 말라를 사랑함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혐오하는 척하는 잭, 그리고 타일러와 잭을 오락가락하며 자꾸만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들)에게 지쳐가는 말라. 이들의 관계는 일면 로맨스 영화와도 같은 부분이 있고 결말부 타일러를 이겨내고 자신의 주체성을 찾은 잭이 "이제 다 괜찮을 거"라며 말라의 손을 잡는 대목은 말 그대로 세기말의 로맨스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지점 외에도 말라 싱어와 타일러(들) 간의 관계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매우 중요한 주제의식이 된다. 바로 '사랑 없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는 주제 말이다.

 

자유, 바로 그렇다. <파이트 클럽>은 자유에 대해 다루는 영화다. 작중 인물들은 모두 문명사회 속에 예속되어 방황하고 불안에 떠는 이들이다. 이들의 행동은 모두 자유를 원했기에 시작됐다. 잭은 타일러를 만들어냈고 말라는 타일러(들)에게 의존한다. 밥을 비롯한 파이트 클럽의 멤버들은 싸움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알아가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이들을 불안하고 방황하게 하는, 그들을 '영적 공황'으로 내모는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세기말이라는 시대적 상황이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면, 새 시대가 오면, 새 날이 밝으면, 가뜩이나 복잡해지고 변화 많아지는 이 세상이 더 수수께끼 같아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 말이다. 이 영화가 다른 해도 아닌 하필 1999년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단순히 우연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이들의 불안은 세기말이라는 현대 문명이 도달해야만 하는 필연적 미지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그것은 근원적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타일러와 파이트 클럽의 멤버들은 불안을 없애기 위해 다른 방안을 고안해낸다. 스스로 사회의 불안이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너무 컸던 나머지 불안에 관한 음모를 스스로 만들어버린 사례 말이다. 대혼란 작전을 수행하는 클럽원들의 모습에서 Y2K가 자꾸만 겹쳐 보이는 이유이다.

 

대혼란 작전의 첫 번째 규칙, 아무것도 묻지 말 것. 영화의 후반부 주요 소재가 되는 이 작전은 말 그대로 사회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 목적인 작전이다. 싸움을 통해 자유를 되찾는다는 파이트 클럽의 본래 목적은 이미 상실되었고 타일러와 작전 구성원들의 머릿속에는 현대 사회에 한 방을 날리겠다는 비뚤어진 반항심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부터 영화는 약간의 판타지 혹은 디스토피아적 요소를 띠기 시작한다. 문명에 세뇌되었던 젊은이들이 이번에는 혼란 그 자체에 세뇌되는 것이다. 이제 잭의 모험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타일러를 찾고, 그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끝내 그를 이겨내야 하는 모험 말이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타일러를 이겨내기 위한 잭의 모험은 진정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마저 불사하는 잭의 용기에서 시작된다. 이제 머리에 구멍이 뚫린 잭, 아니 진짜 타일러는 자유를 찾은 스스로의 모습으로 말라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비유하자면 지킬과 하이드가 비로소 한 몸이 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는 것은 사랑이다. 영화는 여태껏 자유와 사랑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논하고자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해온 것이다.


하지만 타일러와 말라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을 인정하게 된다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익살스럽게 연출되기는 하지만 결국 빌딩들은 폭발하고 대혼란 작전은 실패하지 않는다. 핀처가 영리한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결말에 온점을 찍지 않고 이후의 일에 대해 비관도 낙관도 하지 않은 지점 말이다. 사랑과 자유는 모든 것의 시발점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끝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핀처는 결말을 통해 이 수수께끼 같은 세계에, 곧 도래할 신세기에 일말의 희망이라도 남겨두려고 한 듯하다. 그 희망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21세기의 우리들에게 맡겨둔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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