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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Aug 10. 2022

시간은 무력하게 늙어가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엔 형제 (2007) 리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감독: 코엔 형제

출연: 조슈 브롤린, 토미 리 존스, 하비에르 바르뎀 외

별점: 5/5


총격전이 벌어진 끔찍한 현장에서 르웰린 모스는 우연히 이백만 달러가 들어있는 가방을 손에 넣는다. 그러나 이 가방을 찾는 또 다른 이가 있었으니 바로 살인마 안톤 쉬거. 그리고 이들의 뒤를 쫓는 보안관 에드까지 합세하면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목숨을 건 추격전이 시작된다.




 리뷰는 유튜브 '백년의 영화' 채널에서 영상으로도 만나실  있습니다.


https://youtu.be/amV01bTbR7Q


당장 눈앞에 닥칠 미래가 아무리 알 수 없고 지옥 같더라도 이미 지나온 과거가 ‘좋은 시절’로 변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늙어간다는 건 어쩌면 과거에 대한 합리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시절에 자부심을 갖고 새로운 미래도 개척해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믿음이 배신당한 자리에는 웬 힘없는 노인이 가슴에 구멍 뚫린 채 서있을 뿐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먼저 다른 감독 이야기를 해보는 게 좋겠습다. 미국이 낳은 최고의 배우이자 최고의 감독 중 한 명,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야기다. 미국의 우파적 사상을 상징하는 감독 중 한 명인 그는 한 명의 보수주의자로서, 또 영화인으로서 언제나 ‘품격’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주장해야 할 평화, 자유, 인권과 같은 상식의 수호를 말하며, 그 가치를 지켜내는 게 보수주의자의 사명이라는 듯이. <그랜 토리노>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코엔 형제의 이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출발한다. 보수냐 진보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이전 시대의 유물과도 같은 보수적 가치가 완전히 파괴되고, 알 수 없는 미래만이 펼쳐진 음울한 세계를 다뤄내고자 한다다. 거기에 더해서, 이런 가치의 상실은 앞으로도 회복되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한다. 이런 시선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지점은 낙관과 비관에 있다.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끝없는 성찰과 아픔 속에서 끝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지만, 코엔 형제는 시종 비관적인 시선으로 미래에 대한 일말의 희망조차 제시하지 않는다.


이런 비관적인 시선을 이해하려면 작품의 배경인 1980년이라는 시대상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다. 베트남전과 오일 쇼크로 미국의 사회, 경제적 문제들이 터져나오던 당시는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범죄율을 기록했던 시기였다. 그런 시대를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영화의 오프닝은 “과거에는 보안관들이 총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됐다“던 애드의 처연한 독백으로 시작된다. 은퇴 직전의 늙은 보안관인 애드는 평화로웠던 과거의 시절을 그리워하지만 한편으로는 작중의 세계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 인물이었다. 비록 그의 믿음은 사건의 시작과 함께 무참히 깨져버리지만.

 

은퇴한 용접공인 르웰린은 어느 날 사막으로 사냥을 나간다. 사막 한복판에서 전투 후 전멸한 갱단의 시체들을 발견한다. 차 안 트렁크에는 수백만 달러가 든 가방이 있었고, 그걸 챙겨 집으로 온 르웰린은 그날 잠에 들지 못한다. 다른 이유도 아닌 단 한 명 살아남아있던, 머지 않아 죽을 갱단원에게 물 한 모금을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멍청한 짓임을 알면서도 물을 준비해 다시금 현장을 방문한다. 어김없이 그 자리에는 돈가방을 가져간 그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갱단원들이 있었고, 발각된 그는 필사적으로 도망쳐 돈과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사투를 벌이게 된다.

 

아직까지는 다른 스릴러 영화의 플롯과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다른 작품들과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클리셰처럼 권선징악의 모티프를 가져온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더는 권선징악이라는 개념이 통하지 않는 불의한 세계'에 대해 그리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점에 있다.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는 이 영화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초점은 오히려 복잡해져 가는 세계 속에서 가치를 잃어가는 과거의 개념들이라는 것에 맞춰진다. 그를 뒤쫓는 갱단의 등장은 맥거핀일 뿐이다. 르웰린의 진짜 사투 대상은 그보다 더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인물이며, 그는 일반적인 영화의 '악인'들과는 완전히 결을 달리한다.

 

영화는 선악의 개념이 통하지 않는 건조한 세계처럼 묵직하고 단조롭게 흘러간다. 배경음악조차 절제되어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저 간간히 들리는 총성만이 서스펜스를 조성할 뿐이다. 그런 적막을 뚫고, 침묵 속의 아우성 같은 그토록 무시무시한 인물이 등장한다. 안톤 쉬거. 영화의 원작 소설 작가인 코맥 매카시, 그리고 감독 코엔 형제가 생각한 오늘날 세계의 미래란 곧 ‘미지의 것’이며 ‘두려움’ 그 자체였던 것 같다. 그리고 안톤 쉬거라는 인물은 그 두려움을 그대로 의인화한 대상이라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그는 과장된 측면이 전혀 없이 최소한의 움직임과 표정만으로 관객들을 공포로 몰고 간다. 들고 다니는 무기조차 수수께끼의 것인 이 인물이 가장 무서운 점은, 살인을 저지르는 그에게서 어떤 동기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라고도 볼 수 있다. 누군가의 죽음과 삶, 고통과 행복 등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선악이나 운명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기에. 그것은 오히려 동전 던지기와 같은 숨막히는 우연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또 한 가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이기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르웰린은 자신의 것이 아닌 돈가방을 갖기 위해 사활을 걸고, 애드는 그런 르웰린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은 하지만 실상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를 돕는다. 이런 경향은 극의 주변인들로 갈수록 더 심해진다. 갱단에서 르웰린과 쉬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낸 암살자는 돈가방의 돈을 나눠 갖자며 조직을 배신한다. 르웰린이 국경을 넘기 위해 자켓을 산 청년들은 맥주도 달라는 말에 "맥주는 얼마에 팔 건데요?"라고 묻는다. 심지어는 교통사고를 당한 쉬거가 자신을 못 본 체하라는 말과 함께 돈을 쥐어준 아이들은 그 돈을 어떻게 나눠야 합당할지에 대해 논한다. 이들은 모두 계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나 이들을 섣불리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연 우리 중에 안 그런 사람이 있는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그리는 세계는 악인이 벌을 받는 세계가 아니며, 선인이라 해서 고통을 받는 세계도 아니다. 그저 누구 할 것 없이 수수께끼 같은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인과관계 따위 없이 허무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세계일 뿐이다. 두 형제 감독이 그려내는 세계가 그 어떤 세계보다도 암울하고 황량해 보이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후반부에 이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쫓기는 르웰린과 그를 도우려는 보안관 애드에게 모종의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또 극적인 전개를 통한 해피엔드를 원하게 되겠다. 그러나 코엔 형제가 그리는 무기력한 미래상은 너무도 현실과 닮아 있다. 이미 찾아온 죽음을 벗어나는 일은 사막 한가운데서 홀로 드리는 기도만큼이나 부질없다. 끝내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 르웰린을 보며 애드는 과거의 향수에 빠진다. 세상이 지금처럼 어렵지 않고, 사람들은 이기적이지 않았으며 정이라는 게 존재했던 시절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 시절은 과연 지금과 달랐을까? 애드도 내심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조차도 자신이 늙었기에 시작된 합리화일 뿐이라는 걸. 그가 그리워하는 늙은이들의 시절은, 20세기 초에서 중순에 미국이 겪은 평화와 호황은 지구 반댓편에서 벌어진 그토록 끔찍했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이룩한 것이 아니었던가?

 

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기력한 표정의 애드를 응시하며 마무리된. 그런 애드의 시선은 마치 고향을 잃은 자처럼 위태롭다. 그는 끝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제 이 땅에서 자신의 시절은 가버렸으며, 노인이 된 그를 위한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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