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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Aug 17. 2022

던지는 것에도, 던져지는 것에도 결심이 필요하다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리뷰

헤어질 결심 (2022)

감독: 박찬욱
출연: 탕웨이, 박해일 외
별점: 5/5

산 정상에서 추락한 한 남자의 변사 사건. 담당 형사 '해준'(박해일)은 사망자의 아내 '서래'(탕웨이)와 마주하게 된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남편의 죽음 앞에서 특별한 동요를 보이지 않는 '서래'. 경찰은 보통의 유가족과는 다른 '서래'를 용의선상에 올린다. '해준'은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 탐문과 신문, 잠복수사를 통해 '서래'를 알아가면서 그녀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느낀다. 한편, 좀처럼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서래'는 상대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해준'을 대하는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리뷰는 백년의 영화 유튜브에서 영상으로도 감상 가능합니다.


자의식 과잉의 시대에 로맨스는 가능한가. 현실이 카메라 속보다 더욱 잔혹한 시대에 스릴러는 가능한가. 사랑이란 무엇이고 죄악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대체 그 모든 것을 담은 오늘날의 ‘영화’란 무엇인가. 이런 유의 질문은 박찬욱이 영화를 찍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박찬욱이 제시하는 비전, 그가 정의하는 세계는 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 말이다. <헤어질 결심>은 그래서 더더욱 중요해지는 작품이다. 박찬욱은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을 정의하고 증명하라는 도전에 직면한 모두를 대신하여 외친다. 자신에겐 대답할 이유가 없다고. 대신 그는 묻지 말고 직접 보라는 듯이 관객들을 그 지점 가운데 어딘가로 이끌고 간다. 마치 “이래도 이걸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냐”며 되묻기라도 하듯이.


<헤어질 결심>이 그리는 세계에는 확실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안개 같은 모호함과 조수 같은 격차, 절벽 같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고고한 것도, 추악한 것도, 진실도, 거짓도 무엇 하나 정의될 수 없다. 그저 체념하듯 탈출하거나 미련을 놓지 못한 채 남겨질 뿐이다. 해방이란 이름으로 안개 낀 해변에 영원히 속박된 해준과 그런 그를 두고 체념 가득하게 세상을 등진 서래처럼. 그곳에는 어떠한 구원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이번 작품은 박찬욱이 지금껏 작업한 그 어떤 영화보다도 염세적으로 느껴진다.


이 축축하고 음험한 세계가 이토록 절망적으로 그려지는 이유는 다름 아닌 소통 불가능성에 있다. 글의 첫 두 문장처럼, 그가 바라본 오늘날의 세계가 ‘자의식 과잉의 시대’임과 동시에 ‘현실이 카메라 속보다 더욱 잔혹한 시대’인 탓이다. 둘의 공통점은 존중이 결여됐다는 데 있다. 서로를 존중하는 양방향 소통이 불가능해지는 시대에 구원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사랑이니 죄악이니 하는 것들은 그 개념조차 정의할 필요가 없어진다. 비정상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세계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정상성을 회복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서로 다른 일방통행로를 달리는 자동차 같은 두 사람의 세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로맨스와 스릴러라는 장르는 전복되고 ‘붕괴’한다.


이러한 세계관은 이전까지 박찬욱의 필모그래피와는 크게 궤를 달리한다. 그는 비록 초기작과 후기작 간의 시선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지속적으로 자신만의 불의한 세계를 구성한 후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주제로 작업에 임해왔다. 말하자면 초기의 복수 삼부작(<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이 탈출 불가능성을 논했고 비교적 후기의 <박쥐>와 <아가씨>가 탈출에 대한 희망을 논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작품 <헤어질 결심>은 여기서 더 비관적인 시선으로 옮겨 가, 불의한 세계로부터의 탈출 자체가 무의미할 뿐임을 논한다. 그것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 결말부 서래가 선택하는 자살이다. 비정상화된 세계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세계 자체를 등지고 비존재의 공간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없음을 박찬욱은 그토록 처연하게 논한다. 결국 이런 세계에서 개인의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남겨지지 않는다. ‘던지는 것’과 ‘던져지는 것’. 그리고 이 글의 제목이자 영화의 제목처럼, 두 가지 모두는 나름의 결심을 필요로 한다.


로맨스가 붕괴하는 것이 개인적 차원에서 세계의 몰락이라면, 스릴러가 붕괴하는 것은 사회적 차원에서 세계의 몰락이다. <헤어질 결심>은 이 두 가지 붕괴의 과정을 로맨스와 스릴러라는 장르적 특성을 반반씩 빌려와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제 이러한 붕괴, 몰락의 특성을 하나씩 뜯어가며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로맨스부터.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뉘앙스’를 지속적으로 화면에 담아내지만 단 한 차례도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사랑에는 내적 논리가 너무나도 부족하다. 해준은 서래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설명할 때 자꾸만 말이 달라지고, 서래는 자신을 향한 해준의 사랑이 식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반동적으로 해준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는 타인에 대한 존중 없이 스스로만을 바라보는 오늘날 현대인들의 자의식 과잉을 닮았다. 이들의 사랑은 언제까지고 일방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것은 더 이상 오늘날의 사회에서 고전적 의미의 사랑은, 마치 1960년대의 할리우드와 같은 로맨스는 존재할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한다.


여기서 중요하게 쓰이는 상징이 바로 두 사람이 사용하는 아이폰과 스마트워치다. 스마트기기들은 작중 두 사람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계기로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특기할 점은 이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전하는 대화의 대부분이 이 기기들을 통해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그들은 말보다는 통화와 문자를 하고, 음성메시지를 남기며, 중요한 대사는 비서 앱을 통해 번역된 문장으로 듣는다. 결말부에서는 위치추적기를 통해 서래의 위치를 뒤쫓기까지 한다. 1부와 2부에 걸쳐 두 차례 발생하는 살인사건에서 휴대전화가 주요한 증거로 사용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스마트 기기에 방점이 찍힌 연출은 결국 두 사람을 자의식 과잉 시대로 몰아넣고 양방향 소통을 방해하는 요인 중 큰 부분이 스마트 기기에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스릴러의 측면에서는 어떨까? 마찬가지로 스마트기기는 세계의 사회적 차원의 몰락 역시 큰 부분에서 계시하고 있다. 1부 살인사건의 피해자이자 난민 반대 등을 외치던 전 출입국 관리직 공무원 기도수가 등산을 핑계로 가짜뉴스 등을 퍼 나르는 보수 유튜버였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노골적 알레고리로 등장하지는 않으나 여성, 이주노동자, 불법체류자 등을 향한 혐오 감정은 영화 내내 직간접적으로 드러나고(해준의 동료 형사가 외치는 역차별 발언 등), 현실에서 그런 혐오 정서의 확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인터넷과 스마트폰, 특히 유튜브였다는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영화는 이 지점을 은연중에 지적함으로써 세계의 개인적, 사회적 차원의 붕괴가 결국 ‘현대성’이라는 하나의 테제 아래에서 집합하는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세계의 이러한 사회적 차원의 몰락은 비대해진 자의식으로 인해 누구도 타인을 보지 않게 된 세계에서 필연적인 게 된다. 집단지성이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공동체가 신뢰를 얻지 못하는 사회란 곧 몰락한 사회인 탓이다. 아시다시피, 규범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시스템이 마비된 세계에서 스릴러라는 장르는 그것이 현실과 하등 다를 바 없기에 외면받는다. 그 때문에 고전적 로맨스가 파괴된 것과 정확히 같은 논리로 고전적 스릴러 장르의 문법 역시 파괴되고 만다.


징후적인 부분은 이외에도 많다. 당장 해준과 서래의 캐릭터성을 비교해보더라도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해준은 밤잠을 설쳐 가며 강력범죄 사건을 파헤치고자 하는 자부심 강한 경찰로 그려지는데, 실상 그가 사건을 해결하는 이유는 정의감이나 신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것은 오히려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오는 자기만족에 가깝다. 왜, 해준의 아내는 급기야 살인사건이 없는 걸 우울해할 정도로 심각하다며 해준을 걱정하지 않던가. 이처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자신만을 여기는 해준과 같은 이들은 고전적 서사에서는 악역으로 그려져야 온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해준을 비난할 수 있을 만큼 깨끗한 현대인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진심으로 범인을 잡기 위해 노력한다는 명분으로 자부심을 가지던 해준이 아니었나. 그는 결국 이 비정상적인 시대가 만들어낸 주역 캐릭터였다.


서래의 경우는 더 극적이다. 그는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어찌 보면 소시오패스적 인물에 가깝다. 그런 캐릭터를 로맨스 영화의 주연으로 설정함으로써 박찬욱은 과연 서래의 사랑을 지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자신의 프라이드만을 위해 사건을 해결하는 경찰과 이익을 위해 남편을 살해하고 남을 다치게 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소시오패스의 사랑, 심지어 불륜이라니. 그 이야기를 직시하다 보면 우리는 사랑과 죄에 대한 양면적인 감정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윤리적 맥락에 대한 질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해지는 것은 그 과정에서 몰락하는 세계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답해 보자.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이들은 어떤 죄를 짓고 어떤 사랑을 한 걸까? 과연 이들이 한 게 사랑은 맞고, 죄를 짓기는 한 걸까? 결국 이 영화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이에 대한 대답은 역시 앞과 같다. 이 모든 것은 적어도 그 세계하에서는 ‘정의될 수 없다’. 내 입가에서 네 귓가로 이동할 수 없는 불가능한 소통처럼,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사랑도, 죄도 그 어떤 ‘담론’도 정의되지 못한다. 박찬욱은 거기에 더해 이것을 정의하여 답을 내놓는 것이 예술가의 의무가 아님을 항변하고자 한다. 이 영화가 박찬욱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시네마적인 작품인 이유이다. 예술가의 의무는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것’임을 확실히 하고 있기에.


말하자면 <헤어질 결심>은 현대성이라는 슬픈 시대정신 아래에서 몰락해버린 세계의 회생 불가능성을 말하는 안티-로맨스, 안티-스릴러 영화다. 1부의 마지막에서, 자살로 종결된 기도수의 사건이 잘못되었음을, 그것도 자신이 서래에 대한 감정에 이끌려 오판했음을 깨달은 해준이 “붕괴”를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로맨스와 스릴러가 동시에 전복되는 그 지점을 정확히 꿰뚫어낸 것에 가깝다. 박찬욱은 오늘날의 세계를 ‘정의되는 것조차 거부하는’ 소통 불가능의 시대로 이해한 듯하다. 그런 그의 판단은 상당 부분 일리가 있어 우리는 오늘날 가장 우리의 세계를 잘 마주해낸 시네마를 만나보게 되었다. 그는 2022년의 세계에 가장 어울리는 영화적 문법을 발견해냈으며 스크린 밖 세계의 문제의식을 완벽히 장르적 문법 속에서 녹여내고 그것을 전복시키는 데마저 성공해내고 말았다. <헤어질 결심>은 두말할 것 없는 박찬욱의 최고작이며, 21세기 한국 영화시장에서 만들어진 영화 중 최고의 작품임을 부정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을 인정하는 데도 꽤 큰 ‘결심’이 필요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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