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 건 한밤중이었다. 방 안에 미묘하게 다른 공기가 떠돌고 있었다. 시야가 어두웠다. 어둠의 달콤함에 젖은 눈은 잠의 심연을 막 빠져나온 참이었다. 평소와 무엇이 다른지 알아채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싱크대 옆 쓰레기통이 놓여있어야 할 곳에 무언가가 작게 웅크리고 있었다. 내가 흠칫 놀라는 동시에 그 물체는 일어섰다. 사람의 실루엣을 하고 있지만 팔이 없다. 그것은 등을 돌린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입에서 힘없는 소리가 흘렀다. 제발 돌아보지 마.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그것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얼굴을 보고 숨이 꿀떡 삼킨 달걀처럼 힘겹게 넘어갔다.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의 눈으로 뒤덮인 얼굴. 쪼개진 석류의 단면처럼 보였다. 눈 속에 담긴 감정들은 제각각이었다. 호기심, 놀라움, 마주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분노, 야릇한 웃음, 슬픔인지 연민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 그 모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메마른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꿈이 아님을 온몸이 강변했다. 동시에 기이한 자각이 머리 뒤편에서 솟아올랐다. 나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걸. 이 순간을.
우리는 이 미터 정도의 거리를 둔 채 마주했다. 시선을 옮길 수가 없었다. 저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째서 이런 시각에, 저런 모습을 하고 날 찾아왔을까. 나에게 무엇을 원하지? 생각의 사슬이 뻗어나갔다. 그 궤적을 쫓기라도 하듯 눈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기다렸어." 그것이 말문을 열었다. 소리 여럿이 겹쳐 공간을 채웠다. 성대에서 만들어지는 소리가 아니다. 어린 시절 조립하던 라디오의 싸구려 스피커가 떠올랐다. 두껍고 매트한 진동판을 투박하게 울리던, 쨍하면서 여운이 남는 소리. "기다려?" 반문이 줄 놓은 강아지처럼 튀어나갔다. 무엇을? 다시금 내 생각을 읽은 그것이 대답했다. "너를 바라볼 수 있게 될 때까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방 안은 이상하리만치 적막했다. 집 바로 옆에는 로터리가 있어 차들의 통행이 끊이지 않는다. 깊은 새벽녘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간간히 짐승의 신음소리 같은 자동차 소리가 이중창을 뚫고 들어온다. 지금은 달랐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적막함. 고요의 표면을 불규칙한 내 숨소리만 미끄러져 내리고 있었다. 눈을 뜨고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조차 어려웠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서 있었다. 벌떼처럼 교차하는 생각들 중 하나를 골라 입을 열었다. "넌 누구야?" 눈동자들이 서로 쳐다보듯 일정한 짝을 이루어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내 제자리로 돌아와 나를 향했다. "알고 있겠지만." 눈들이 말했다. "너에겐 내가 필요해." 현미경으로나 보일 만큼 작은 수억 마리의 미꾸라지가 머리를 휘젓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 눈들을 바라보다 문득 하나의 사실을 알아차렸다. 실눈을 뜨고 있는 것, 분노로 시뻘건 것,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 품고 있는 감정은 제각각이지만 그 생김새는 전부 같았다. 대번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서려있는 감정에 따라 상이해 보이는 마음의 창. 그 모두는 내 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상황을 해석해 보려는 내 의지와 반대로 머릿속은 점점 혼탁해졌다. 두려움의 장막 사이로 희미한 그리움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자석의 양극처럼 상반된 감정들이 주위의 미세한 생각들을 끌어당겼다. 그것은 인내심 있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불러낸 거야?" 눈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대답이 이어졌다. "널 불러낸 건 나야." 눈살이 찌푸려졌다. "무슨 소리야? 여기는 내 방이야. 넌 갑자기 나타난 거고." 눈들이 옆으로 좍 찢어지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틀린 말도 아니고." 주위를 바라보며 그것이 말했다. 그제야 나도 시선을 옮길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듯 보였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다. 그 차이를 특정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사물의 음영이 왜곡되어 있다. 응당 드리워져 있어야 할 그림자가 없는가 하면 없어야 할 곳에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너의 세계가 껴안지 못하는 건 전부 이곳으로 오거든." 그것이 부연했다. "없어지는 게 아니야." 음높이가 조금 올라갔다. "받아들이는 것에 한계는 없어. 착실히 쌓여가지. 차곡차곡. 때론 너 스스로 있던 것들을 거둬가기도 해. 너는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이쪽으로 넘어오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어. 그것이 작동 원리니까. 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단지 순환할 뿐이야." 잠깐의 정적 후 말이 이어졌다. "눈에 보이던 것이 갑자기 사라지면 그 부재를 알아차리기 쉬워. 보이지 않는 것들의 행방엔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어디론가 자리를 옮겼다고 알아채는 일은 없어." 눈들이 여러 방향을 향했다. "우리의 세계를 잇는 틈새는 분명하게 존재해. 하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인지하지 못하는 관념은 존재의 대상이 아니니까. 시간의 틈에선 많은 것들이 새어 나와." 한결 나른해진 소리가 이어졌다. "소중한 것들이 희미해진 적 있지? 마음을 짓누르던 감정이 사그라든 적도 있을 거야. 그 이유를 생각해 봤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개의치 않는 듯 나를 응시했다. "더 이상 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니 편안하지. 그렇다고 절대 사라진 게 아니야. 밀려들어오지. 거대한 풍선에 밀려 밖으로 던져지는 물고기들처럼."
"나를 부른 이유가 뭐지?" 물고기들의 표정을 떠올리던 내가 물었다. "여기서 나갈 수는 있는 거야?" 눈동자들이 서로를 향했다. "이곳에 온 건 내 부름에 답한 너의 자유의지야." 처연했던 어조가 갑자기 바뀌었다. "너도 그 점을 알고 있을 거야!" 공간이 부르르 떨렸다. 흠칫 놀라는 나를 안심시키듯 누그러진 말투가 이어졌다. "말했듯이 받아들이는 데 한계는 없어. 하지만 임계점이 있어." 나는 피식 웃었다. "한계는 없고 임계점은 있다고? 말장난 같은데." 단호한 어조가 답했다. "둘은 엄연히 달라. 한계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범위를 뜻해. 임계점은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지점을 말하고."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떠안지 못하는 것들을 계속 받아들이다가 '임계점'에 도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지? 대답은 없었다.
주위의 정적은 녹을 기미가 없었다. 창 밖의 세계엔 생명의 기척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적요하게 떠 있는 달만이 생동하고 있었다. 일순 피로감이 밀려와 눈을 감았다. 갑자기 귓전에서 속삭임이 일었다. "밝고 어두운 건 늘 함께야. 밝은 것들이 많을 때도, 그 반대일 때도 있어. 하나가 사라지는 일은 없어." 눈을 뜨고 싶었지만 떠지지 않았다. 속삭임이 반대쪽 귀로 이어졌다. "그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으니까." 고함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것의 생각은 이제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모든 것은 조화를 이루고 있어. 반대되는 것들의 총량은 같아. 어느 한쪽이 더 커 보인다는 건 그 반대가 어디엔가 도사리고 있다는 의미야." 더러운 욕조 바닥을 맨발로 밟고 있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암흑과 침묵에 속박된 무력감.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것이 말했다.
"도로 가져가."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조심스레 얼굴에 손을 대 보았다. 두 개의 눈이 만져졌다. 코도, 입도 있었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것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구석의 쓰레기통도 그대로였다. 머리가 이상하리만치 맑았다. 나는 침대를 내려와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창 밖은 등교하는 학생들과 인내심이 다한 차들로 북적거렸다. 로터리 너머 버스 정류장엔 새들처럼 고개를 숙인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냉장고를 열다 흠칫 놀랐다. 냉장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퇴근길에 장을 본 것이 이틀 전인데 마치 새것처럼 말끔했다. 말라붙은 병의 자국이라던가 음식물의 흔적 하나 없었다. 나는 황급히 찬장을 열어젖혔다. 그릇이며 컵이 모두 사라진 텅 빈 공간이 눈에 찼다. 순간 잠이 덜 깬 건가 하고 손으로 오른쪽 볼을 쳤다. 작은 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통증이 일었다. 방문 쪽으로 걸어가 옷장을 열었다. 짙은 원목 옷걸이에 검은 옷 한 벌이 덩그러니 걸려있었다. 이건 내 옷이 아니야.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옷걸이를 집어 들었다. 비늘 같은 감촉에 눈을 찡그리는 찰나 옷이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빈 옷걸이가 손끝에서 흔들렸다. 오랜 세월 손길이 닿은 듯 맨질맨질했다.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납작해진 도자기 반죽 같기도, 똬리를 튼 검은 뱀 같기도 한 옷뭉치가 그곳에 있었다. 일순 몸서리가 쳐졌다. 이토록 아린 그리움은 처음이었다. 눈물이 타닥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허리를 굽혀 옷을 집어 들었다. 익숙한 내음이 콧 속을 파고들었다. 검고 소매가 없는 옷을 황망하게 매만지는 동안 깨달았다. 내가 그곳에 놓고 온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