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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오 Jun 19. 2019

고문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콧날을 간지럽히며 하강해 스크램블 에그라도 만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달아오른 보도블록 위로 떨어졌다. 맞은편의 전광판에는 [ 올여름 최악의 무더위 - 42도 돌파 ]라는 뉴스의 자막이 주황색과 연두색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아이스 모카의 빨대를 입에 물고 한 모금 힘 있게 빨았다. 똬리 튼 뱀처럼 아이스 모카 위에 빙 둘려있던 생크림은 무더위에 속절없이 녹아 내려앉고 있었다. 알프스의 만년설처럼 사뿐히 뿌려졌던 초콜릿 파우더는 짜부라진 생크림 위에서 불쾌감을 자아냈다. 나는 황급히 빨대를 저어 생크림을 아이스 모카 속에 묻어버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너무나 더운 날씨였다. 그리고 나는 이 무더위 속에서 2시간 30분 동안 여자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저.. 한 모금 마셔도 될까요?" 

땀으로 얼굴이 뒤범벅된 한 청년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대략 짐작컨대 나보다 2살쯤 많거나 같아 보이는 나이였다. 어이없는 질문이었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아이스 모카를 내밀었다. 거절할 기운조차 없었다. 완전히 녹아들지 않은 생크림이 빨대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하아. 굉장히 더운 날씨죠?"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는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땀방울이 보도블록으로 떨어졌다. 그가 확인해주지 않아도 정말이지 더운 날씨였다. 찰칵 소리를 내며 그의 라이터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면 체온이 1도 올라간다는 여자 친구의 말이 머릿속에서 웅웅거렸다. 그는 나에게도 담배를 내밀었고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꽤나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M사의 담배 중에서도 그가 피는 담배는 가장 독한 것이었다. 
후우.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그가 말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이 날씨엔 무척 짜증 나는 일이죠."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누굴 기다리고 있어요?" 
"여자 친구." 

나는 대답과 동시에 그녀를 떠올렸다. 핑크색을 좋아하는 발랄한 20대 초반의 재즈댄스 강사로 늘 하얀색 신발을 신고 다닌다. 교제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나는 차츰 그녀에게 달콤한 감정을 느껴가는 중이었다. 

"얼마나 기다렸어요? 꽤 오래 기다린 것 같은데." 

나는 시계를 보고 대답했다. 

"2시간 34분요." 
"그 커피도 2시간 34분 동안 함께 기다린 거예요?" 
"아뇨. 15분쯤 전에 이 앞에서 사 가지고 나왔습니다." 

나는 앞에 있는 커피숍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알았다는 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날씨에 2시간 34분 동안 기다리게 하다니. 너무하는군요. 들어가서 기다리지 그래요." 

"핸드폰 배터리가 다 돼서 연락할 길이 없어요. 커피숍에서 물어봤는데 충전기가 없다네요."

"제 핸드폰 쓰실래요?"

"괜찮습니다. 커피 다 마실 때까지 안 오면 그냥 가려고요."


그는 기다림이라는 혐오스러운 행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시간 이내의 기다림은 긴장을 고조시켜 주지만 그 이상의 기다림은 사람의 감정을 격앙시키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수긍이 갔다. 지금의 나는 상당히 감정이 격앙되어 있었다. 그는 시계를 힐끗 보더니 20분째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현시점에서 볼 때 나는 2시간 40분 동안 여자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된다. 

"아휴. 여자 친구분도 너무합니다. 이건 고문이에요, 고문." 

그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나는 고문당하고 있었다. 핑크색을 좋아하는 발랄한 재즈댄스 강사에게. 이유도 모른 채. 2시간 40분이라는 시간에 나는 좀 더 건설적인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옥상에 올라가 시베리안 허스키가 배설해 놓은 거대한 오물을 쓸어 담고 방으로 내려와 [ Girl From Ipanema ]를 틀고, 부엌으로 들어가 베이컨이 들어간 브로콜리 파스타를 만들어 테라스의 작은 탁자에 앉아 여름을 즐기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갑자기 착취당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친구가 도착한 것은 2분쯤 지나서였다.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커피 잘 마셨어요." 
불쾌지수의 치마폭에서 놀아나고 있던 나는 청년에게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여자 친구가 도착한 것은 청년이 아홉 걸음 정도를 떼었을 때였다. 

"많이 기다렸죠? 죄송해요. 차가 너무 막혀서요. 정말 굉장했어요. 후끈거리는 아스팔트 위의 러시아워." 

러시아워? 
이 여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서울 어디서 택시를 타고 와도 남을 시간이다. 마치 폐품 회수를 위해 구석에 모아둔 한 뭉치의 신문지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열심히 늦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뜨거운 햇빛 아래 고문당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청년은 아홉 걸음을 다시 되돌아와 나에게 물었다. 

"이분이 여자 친구세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나의 여자 친구는 그가 누군지도 모른 채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청년이 여자 친구의 따귀를 때린 것은 "안녕하세요"의 요 자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철썩 

청년은 힘 있게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 저 앞에서 그의 친구가 경악하며 움찔하는 모습과 다시 아홉 걸음을 걸어 친구를 데리고 가던 길을 걸어가는 청년의 모습이 영화의 슬로 모션처럼 눈에 들어왔다. 주위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고 여자 친구는 오른쪽 뺨에 벌건 손자국이 난 채로 나를 올려다봤다.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아무 말 못 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고문당하고 있었다. 너무나 더웠다. 

"저 사람 뭐죠? 왜 갑자기 나를 때리는 거...." 

내가 그녀의 따귀를 힘 있게 때린 것은 그녀가 "죠?"라는 단어를 말할 찰나였다. 

시베리안 허스키의 배설물과 감미로운 보사노바, 그리고 알단테의 베이컨 브로콜리 파스타를 생각하며 자리를 떠났다. 누군가의 따귀를 그렇게 힘차게 때려본 것은 내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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