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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오 Apr 17. 2019

이동통신

잠긴 방에서 쓴 글을 나와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필사하던 날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며 시작된 상담원의 말에 빈틈이라곤 없었다. 고성능의 컴퓨터처럼 질문에 거침없이 답변하는 그녀. 지금 요금제가 보다 더 저렴하세요 고객님. 빈틈없는 그녀에게 나는 야릇한 증오를 느꼈다. 수많은 버튼의 조합 끝에 이뤄진 그녀와의 조우가 허무하게 끝나려면 여지없이 화가 난다. 나는 고객의 이름으로 철퇴를 가했다. 프렌즈 요금으로 바꿔줘요. 그녀는 변화 없는 목소리로 친구 두 명의 번호를 물었고 난 경은과 동준을 택했다. 경은은 둘도 없는 친구고, 동준은 나의 연인이니까. 하지만 한 달 전 나의 선택이 무색하게 동준의 전화는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그를 세 시간째 기다리고 있는 나는 그야말로 폭발 직전이었다. 연결음 대신 흘러나오는 줄리 런던의 Fly Me To the Moon은 나의 애창곡이지만, 세 시간 동안 그를 숨겨주고 있는 그 노래는 더 이상 재즈가 아닌 레퀴엠 같았다. 나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쥐스킨트의 책을 내려다보았다. 책벌레인 동준이 나에게 선물해 준 책이었다. 하지만 동준은 오지 않고 그의 책만이 나와 함께 있었다. 그때 칸타타가 흘렀다. 경은이었다. 5시에 플라스틱에서 만나기로 한 것 잊지 마, 라며 건조하게 약속을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다. 시계를 보니 3시 30분이었다. 지금 동준이 도착한다 해도 20분 정도밖에 함께 할 수 없다. 나는 책을 집어넣고 벤치를 떠났다. 밤 9시 비행기에 올라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경은을 만나기 위해서.

버스에 올라타서도 연신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헐레벌떡 뛰어온 동준이 뒤에 남겨진 것은 아닐까 하는 로맨틱한 상상이 떠나지 않았다. 예상외로 시원한 도로를 달리는 버스. 어쩌면 경은도 조금 일찍 나와서 둘이 예정보다 빨리 만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친구 경은. 학창 시절 나는 그녀의 그런 뻣뻣한 매력에 끌려 친구가 되었었다. 그런 그녀답게 출국 당일 나를 만나 여유로운 척 작별을 고할 것이다. 하지만 뭐, 요즘엔 둘 다 바빠서 만날 수 없었으니까라고 생각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카페 플라스틱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서점의 유리창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서점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 동준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과부하가 걸린 나의 머리와는 상관없이 내 몸은 조용히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정신없이 책을 읽는 동준의 뒤에 서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나트라의 춤이 흐르자 동준은 전화를 꺼내 조용히 수신거부 버튼을 눌렀다. 그때 내 머릿속 퓨즈 하나가 끊어졌고 내 손은 뒤에 꽂힌 무거운 백과사전으로 향했다. 삽시간에 기습당한 동준은 바닥에 쓰러졌고 나는 서점을 나와 플라스틱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이젠 끝이야.

일찍 도착한 플라스틱에 경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는데 메시지가 도착했다. 못 보고 갈 것 같아 미안 건강하고. 나는 바로 통화버튼을 눌러 경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의 전화는 이미 꺼져있었다. 나쁜 년. 내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자 물을 내려놓던 종업원이 당황하며 쳐다봤다. 아뇨, 나는 고개를 젓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새 출발을 할 때 전화번호를 바꾸거나 이동통신을 해지한다. 하지만 꺼져있는 경은의 전화는 그녀의 향후 거취가 어찌 되건 시간을 잡아둔 것 같았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로 시작되는 사서함의 멘트는 새까맣고 깊은 느낌이었다. 나는 웃었다. 그리고 한 달 전 그 상담원의 저주가 아닐까 생각했다. 부득불 신청한 프렌즈 요금제의 두 사람은 나에게서 떠났다. 말없이 플라스틱을 나와 걸었다. 걷다가 만난 휴지통에 동준의 책을 넣고 나서, 나는 다시 한번 경은에게 전화를 걸어 멈춰진 시간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요금제를 바꿀까 생각하다 나는 종료 버튼을 꾹 눌러, 이동 전화기의 전원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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