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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오 Jun 14. 2019

다른 언어로의 꿈

십 년쯤 전 데이트하던 뉴욕의 친구가 어느 날 영어로 꿈을 꾼 적이 물었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없다고 대답했다. 본인은 영어로 꿈을 꾼다고 했다. 영어권 국가 출신이 아닌 그는 영어로 꿈을 꾸기 시작한 그날부터 자신이 영어를 잘한다고 느꼈다고 거들먹댔다. 나는 묵묵히 들으며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 생각했다.


그 대화도 기억의 심연으로 가라앉았을 즈음 영어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진 몇 번의 꿈이 필요했다.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다. 꿈에 등장하는 배경이 런던이고 꿈속의 인물들도 영어를 사용하는 주위 사람들이다. 영어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게 합리적이다. 서울을 떠난 후 몇 년간은 한국의 지인들이 꿈에 나왔었다. 런던이 집이라는 자각이 자리 잡으며 무의식의 무대도 자연스레 자리를 옮긴 것뿐. 그의 거들 먹이 떠올라 혼자 웃었다.


꿈의 기억은 강한 휘발성이라 깨고 나면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만다. 머리맡에 노트를 놓고 희미하게 부유하고 있는 기억을 인출하는 부지런함이 없기에, 꿈이 어떤 언어로 진행됐는지 딱히 알 길이 없었다. 어느 게으른 일요일 오후, 파트너가 늦게 일어난 나를 위해  스크램블 에그와 베이크드 빈즈를 만들며 한마디를 던지기 전까진. "너 어젯밤 일본어로 잠꼬대하더라?" 나는 웃었다. 필경 미나미나 나미 누나가 꿈에 나온 것이겠지. 전 연인의 이론대로라면 나는 무척 일본어를 잘하는 것이 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수년간 같이 살던 일본인 플랏 메이트 미나미와 상사였던 나미 누나. 그들이 아니면 딱히 꿈에 등장할 일본인도 없고, 누군가와 꿈속에서 일본어로 대화할 일도 없다.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를 배운다면 언젠간 그 언어들로도 꿈을 꾸겠지? 꿈에 등장할 상대는 주위에 많으니까. 별것도 아닌데 갑자기 의욕이 생겨 책꽂이 구석에 꽂아놨던 '걸음마' 서적들을 빼들었다. 엉뚱하게 부여된 동기가 꿈만큼 휘발성이 아니기를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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