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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오 Apr 09. 2023

식도락의 서막

<음식으로 삶을 기억하는 사람>의 첫 에피소드 주제로 단박에 떠오른 건 김치였다. 의아했다. 청소년 때 부모님 집을 나온 이후로 냉장고에 김치가 없었던 날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치가 나에게 이야기를 걸어온 건, 내 식생활이 김치 이전과 이후로 나뉘기 때문일 거다.  






유년기의 나는 편식이 심했다. 채소는 잘 먹지 않았고 기름진 음식을 좋아했다. 베이컨이 돌돌 감긴 떡말이나 케첩을 곁든 스팸, 맥도널드, 피자라면 사족을 못 썼다. 패밀리 레스토랑은 <찰리의 초콜릿 공장>과 같았다. TGI 프라이데이에선 항상 포테이토 스킨과 버펄로 윙을, 베니건스에선 몬테크리스토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칠면조 고기와 햄, 치즈를 넣은 샌드위치에 튀김옷을 입혀 튀긴 음식이다. 라즈베리잼과 감자튀김이 곁들여진다. 그 많은 몬테크리스토 샌드위치를 먹고 지금껏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베니건스의 마무리는 데스바이초콜릿 Death by Chocolate이었다. 설탕 자루로 귀뺨을 맞는 듯한 당도의 초콜릿 아이스크림 케이크 위에 녹은 초콜릿 시럽을 뿌리는 디저트다. 탁월한 작명 센스다.


당연히 살도 많이 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당시 몸무게가 지금과 얼추 비슷했다. 고도의 편식으로 인해 매운 음식에 대한 저항력이 전무했다. 김치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물그릇에 모든 양념을 씻어내고서야 먹었다. 초등학교 6학년의 어느 날, 놀이터에서 모터카를 가지고 놀다 들어온 우리에게 용수 어머니는 신라면을 끓여 주셨다. 어머니는 내가 매운 것을 못 먹는다는 사실을 모르셨고, 진라면 순한 맛만 먹던 나는 신라면이 그렇게 매운 줄 몰랐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2리터 들이 물통 하나를 전부 비운 기억이 난다. 한동안 트라우마였다. 






편협한 식생활에 격변이 찾아온 건 중학교 때다. 국가 규모의 경제 위기가 터지고 모두가 혼란했다. 성난 사춘기와 맞닥뜨린 나 역시 온전치 못했다. 겉으로는 모범생 행세를 하면서 뒤로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다녔다. 딱 봐도 잔털이 올라오기 시작한 애송이들에게 양심을 파는 술집 주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모님이 부재중인 친구 집을 전전했다. 곁들 안주라고 해 봤자 새우깡, 냉장고의 김치, 양푼냄비에 끓인 신라면 정도였다. 왜 신라면은 이렇게까지 인기가 많은 걸까,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강소주를 마실 수도 없고, 새우깡만 놓고 마시자니 속이 아팠다. 김치와 라면에 젓가락을 대길 꺼려하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친구들의 또래압력이 담배연기로 자욱한 작은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울며 겨자 먹기로 조금씩 먹기 시작했는데, 자꾸 먹다 보니 주량과 함께 매운 음식에 대한 내성도 올라갔다.   


골뱅이와 소면, 매운 주꾸미 볶음, 낙지볶음 같은 술안주도 섭렵하며 즐길 수 있는 음식의 폭이 크게 늘었다. 김치도 좋아하게 됐다. 집집마다 김치 맛이 천차만별이라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지문처럼 고유한 그 뉘앙스는 맛의 다채로움을 깨닫는 발단이 됐다. 음식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내 편식은 종지부를 찍었다. 음식을 고르게 먹다 보니 살도 자연스럽게 빠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청소년기의 비행(非行)이 내 삶에서 가장 크고 유용한 변화를 초래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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