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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오 Apr 16. 2023

공식에서 벗어나도 괜찮아

어렵게 생각하면 끝없이 어려운 김치 담그기

한국에서 만난 미국인 남편은 김치를 무척 좋아했다. 맛뿐만 아니라 프로바이오틱스의 장점에도 깊게 매료되어 있었다. 둘이서 반찬으로 먹고 요리도 하다 보니 소비량이 꽤 많았다. 멀리 있는 한국 식료품점에서 끙끙대며 들고 오는 것도 일이었고, 배달을 시키려면 100 파운드 이상 주문해야 했다. 김치를 담가보자는 것은 그의 제안이었다. 
 

인터넷을 참조해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만들었다. 제대로 시도하는 건 처음이라 긴장이 됐다. 같이 살던 일본인 친구 미나미와 남편이 신문지를 깐 바닥에 쪼그려 앉아 절인 배추에 양념을 버무렸다. 그 둘의 사진은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가 망가지며 사라졌지만, 그 모습은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초심자의 행운(beginner's luck)' 덕분에 김치는 대성공이었다. 그 후로 시간이 날 때면 종종 함께 김치와 깍두기를 담가 먹었다.





 

십 년 가량을 함께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이사를 하고 한동안은 눈코뜰 새 없이 바빠 김치를 담글 여유는 없었다. 그러던 중 코비드 19 팬데믹이 터졌다. 외출은 약국이나 생필품을 사기 위한 하루 한 번의 외출과 반려견 산책만 허용됐다. 세 번의 전면 봉쇄는 반년 넘게 지속됐다. 일을 못 하니 수입도 끊겼다. 고민이 찾아왔다. 이 혹독한 시간을 넷플릭스와 맥주로 달랠 것인가, 아니면 평소 해 보지 못한 무언가를 성취하는 시간으로 치환할 것인가. 나는 후자를 택했다. 


강제적으로 부여된 자유시간이 살면서 몇 번이나 있을까 싶어 끝없이 요리를 했다. 그리고  김치를 담그기로 했다. 다행히 인근의 청과물 가게에 배추가 있었다. 물리(mooli)라고 부르는 삐쩍 마르고 바람 숭숭 들어간 무도 있었다. 냉장고에 액젓은 없었지만 새우젓은 있었다. 할머니께선 새우젓과 양지를 우린 육수로 감칠맛을 내셨다고 한다. 그 맛에 익숙하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우리 집 김치는 새우젓으로만 담갔다. 그리웠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음에 드는 양념을 완성했다. 


금방 쉬어버려 해외 유통이 안 되는 오이소박이도 매일 먹었다. 세척 후 토막 내고 십자 모양 칼집을 낸 오이에 팔팔 끓인 소금물을 붓고 절인다. 부추 등에 버무린 양념을 칼집 사이에 끼우고 푸드 컨테이너에 차곡차곡 담는다. 실온에 하루 정도 놔뒀다 냉장고로 옮기면 금세 익는다. 같이 사는 영국인 친구도 무척 좋아해 기쁜 마음으로 나눠 먹었다.  봉쇄가 풀리고 나서도 김치 담그는 일은 일상의 즐거움이 됐다.

 

 




홈메이드 김치에는 특유의 낭만이 있다. 절이는 과정과 무치는 양념의 양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먹을만한 김치가 완성되는 것 같다. 김치를 담그면서 느낀 점이 있다. 많은 사람들, 특히 해외 거주자들이 선뜻 도전하지 않는 이유는 복잡한 레시피에 있는 것 아닐까 하고. 


많은 레시피가 상당히 많은 재료를 필요로 한다. 김치 맛을 좋게 하는 요소들에 초점을 맞춰서다. 청각, 미나리, 매실액, 배즙 등은 해외에서 구하기 요원하다. 재료가 많으니 부담스럽다. 레시피에 있는 것들을 안 넣으면 안 될 것 같아 전전긍긍하기 쉽다. 그런 건 깡그리 무시해도 된다. 주재료가 되는 채소, 굵은 고춧가루, 마늘, 생강, 젓갈, 설탕, 쪽파만 있어도 김치를 만들 수 있다. 맛있고 손쉽게 김치를 담글 수 있도록 개발하고 특허까지 출원했다는 농촌진흥청의 김치종합양념소도 "4인 기준 김장 시 사용되는 절임배추 50kg의 경우 고춧가루 2.25kg, 마늘 1kg, 생강 500g, 찹쌀풀 4.25kg, 젓갈 2.5kg, 깨 250g, 설탕 250g을 섞으면 과학적인 김치맛을 내는 양념소가 된다"라고 밝히고 있다.* 


나 역시 팬데믹 동안 최소한의 재료로 김치를 담가 맛있게 잘 먹었다. 설탕이나 깨도 넣지 않았다. 청각이나 미나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쪽파가 없으면 파를 썰어 대신했다. 한 번 담글 때 넉넉하게 양념을 만들고 남은 것을 소분하여 냉동실에 얼려 사용했다. 명인의 맛이 아니더라도 김치는 김치다. 오마카세 장인이 쥐고 바로 카운터에 올려주는 초밥만이 초밥이 아닌 것처럼.



 

있는 재료로 담근 배추김치




오이소박이를 비롯한 '내맘대로' 런던 김치들




*농촌진흥청, "농촌진흥청 재료·시간 절약해 주는 ‘김치종합양념소’ 개발", 보도자료, 2013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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