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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오 Sep 25. 2023

레시피는 내비게이션이 아닌데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길을 지도 없이 찾는 건 무척 어렵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식재료와 조리방법들 사이에서 레시피는 여정표 역할을 한다. 필요한 재료 목록을 참조해 장을 보고, 조리 순서를 따라 요리한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요리책이나 잡지, 티브이 방송으로 레시피를 접했다. 요샌 인터넷 레시피가 너무 많아 무엇을 봐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읽었을 때 이해되지 않는 조리법은 유튜브에 영상이 있다. 만드는 법을 몰라 못 만들 음식이 없어진 세상이다.  


레시피의 저변에는 묘한 자신감이 깔려 있다. 마치 누군가의 '성공 사례' 같아 믿음이 생긴다. 평소 자유롭고 즉흥적인 성격임에도 레시피는 종교적으로 따랐다. 제시된 재료는 가능한 한 모두 준비했고, 구하기 힘든 재료를 사러 멀리 가는 일도 많았다. 조리법 역시 세세히 지켰다. 없는 도구를 요구하면 샀다.  


레시피에 대한 신뢰는 점차 강박이 되어갔다. 외국 사람들이 쓴 한국 음식 레시피를 보고 기가 찬 경험을 몇 번 하고 나선 현지인들이 쓴 레시피에 집착했다. 야후재팬이나 스페인 구글 등 지역 검색에서 로컬들의 레시피를 찾아 번역해 썼다. 정통 레시피에 대한 집착은 요리의 다른 영역으로도 퍼졌다. 일본 요리를 하면 간장부터 맛술까지 일본산을 썼다. 몇 번 사용하지 않은 식재료가 모이고 버려지는 동안 즐거움을 줬던 요리는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기가 점점 꺼려졌다.  






변화가 생긴 건 음식을 둘러싼 일련의 직업들을 거치면 서다. 고전적인 레시피를 가지고 조리의 디테일과 재료의 질로 승부하는 곳, 기존 음식의 틀을 깬 레시피들로 호응을 얻은 브랜드를 지나 푸드 저널리스트로서 요리의 상위 개념인 식문화와 식재료를 다양한 앵글로 접하다 문득 깨달았다.


요리에는 정석이 없는데.
완벽한 레시피는 신기루다.
그동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네.  



음식의 맛은 지극히 상대적이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있고 맛을 느끼는 정도도 다르니까. 레시피 역시 누군가의 입맛에 의해 쓰인 것이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는 이유다. 온라인 레시피에 달린 평점과 리뷰도 개인의 의견이 모인 것뿐. 나는 그 사실을 간과하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레시피의 ‘형식’  자체에 신뢰성을 부여했다. 맹목적으로.  






레시피의 재료들과 그 양에서 벗어났다고 실패한 음식이 아니다. 똑같이 따라 해도 내 입맛에 안 맞을 수 있다. 조리시간도 그렇다. 한 끗 차이로 식감이 바뀌어버리니 요리에서 무척 중요한 요소다. 레시피의 조리시간은 대개 주방마다 환경과 세팅이 다른 점을 반영하지 않는다. 집집마다 냄비와 프라이팬의 재질과 크기가 제각각이다. 여기에 인덕션이냐 가스레인지냐가 더해지면 열이 전달되는 방식, 달궈지는 시간 등에 차이가 생긴다. 같은 양의 재료를 사용해도 조리 시간의 편차는 피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후실리(fusilli) 면을 끓는 물에 6분 삶으면 먹기 좋게 꼬들꼬들한 알덴테(al dente)가 된다고 해서 6분 타이머가 울리고 물을 버리면 설익은 파스타를 먹기 십상이다. 6분 전후로 면을 꺼내 직접 씹어보고 조리시간을 가감해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토마토소스에서 바질을 넣는 타이밍을 '토마토의 냄새가 변할 때' 라던 이탈리아 친구의 말이 와닿았던 이유다. 산미가 줄어드는 시작하는 시점에서 달콤한 냄새가 올라온다. 한 번에 알아차리긴 쉽지 않지만 몇 번의 반복으로 체득할 수 있고, 평생 잊지 않을 감각의 기억이다.  


레시피를 그냥 따라가는 내비게이션이 아닌, 방향과 거리를 헤어리는 여정표로 보기 시작했을 때 요리가 즐거워졌다. 요샌 현지인이나 특정 전문가의 레시피에 매몰되지 않는다. 어느 한 레시피를 그대로 따르지도 않는다. 여러 레시피를 둘러보고 그 속의 공통분모를 찾는다. 레시피마다 공유하고 있는 요소들이 그 음식의 핵심이다. 나머지 것들은 부수적인 개인 취향에 가깝다. 청각이 들어가지 않은 김치도 맛있다. 김치찌개에 토마토를 넣을 수도, 베이컨을 넣을 수도 있다. 결국 음식이란 자신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다. 레시피의 재료를 취향대로 가감하고 본인의 스타일로 재해석하다 보면 요리의 한계는 사라진다. 아니, 그 자체로 새로운 레시피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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