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N年10月
그이의 부모님은 우리가 연애를 한지 2년쯤 되었을 때 그이 형의 결혼식장에서 짧게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얼마후, 예상 못한 순간에 긴 만남이 이루어졌다. 나는 일종의 면접 상황을 직면하게 되었고, 일단 통과할 의향이 있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답했다. 그러나 ‘본가’ 같은 질문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숙제 한 기억을 끌어올려 답했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호구조사였다. 내가 받은 점수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날 아버님 점수 짜게 드렸다.
4년 한 연애를 내가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어가고자 했을 때, 결혼을 하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따져봐야했다. 나는 성인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가정에서 걸어나와 새 가정을 함께 꾸리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 모두가 내 마음 같지만은 않다. 국어사전에 시집이란 ‘시부모 혹은 남편의 집안’이라는 뜻이고, 장가란 ‘사내가 아내를 들이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혼식장에서는 아직도, 아버지가 신부 손을 잡고 들어가서 남편에게 넘겨주는 의식을 치르고 있다. 시대가 변했다지만 많은 부분에서 결혼에는 가부장적 가치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서로의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야겠다는 대화를 나누었을 때, 나는 어릴 때 TV에서 흔하게 보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남자가 여자 집에 방문해서 무릎을 꿇고 ‘따님을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여자의 아버지는 술을 건네는 모습 말이다. 이러한 일련의 결혼 과정이, 책임과 권한의 이동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나도 그를 원가족에게서 데려오는데 책임과 권한을 짊어져야지. 나는 내가 어떤 태도여야 하는지를 점검했다. 우리가 원가족에게서 완벽하게 분리될 수 없기에, 내가 그이의 원가족 사이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그이도 나의 원가족 사이에 들일 수 있도록, 나 역시 비장하게 ‘아드님 주십시오.’ 허락을 받아야겠다.
나는 날을 골랐다. 그리고 만났다. 공식적인 자리답게 네 사람 모두 현대인들의 전투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대화는 거의 어머님의 일상 이야기였다. 오전에 스포츠 댄스 대회에 나갔었고, 서예 동아리 사람들과 만났고, 어제는 스포츠웨어 판매처인 무슨 브랜드 회장과 점심을 먹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아버님께서 여행가셨다가 난생 처음 선물을 사오셨다고 신나하시기도 했다. 물론 얇고 반짝이는 팔찌를 더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배부르게 식사를 끝내고, 집으로 가서 함께 쌍화차에 과일을 먹었다. 이때쯤이면 되었다고 느끼고 무릎을 꿇고 앉으려 몸을 움직였다. ‘일어나게? 왜..’ 하는 아쉬운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라고 말하며 척추를 세워 무릎으로 앉았다. 심호흡을 한번하고, 너무 진지하지도 않고 너무 장난스럽지도 않게 시작했다.
“어머님, 아버님. 오빠 멋지게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책임지고 행복하게 살게요. 어머님 아버님 결혼 허락해주세요.”
확신으로 채운 눈동자와 환한 웃음을 더했다. 그이의 부모인 두 사람은 소리 내어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허락하시면 한번 안아 달라고 그이가 거들었고, 허그가 일상인 집이었기에 어머니와 어깨를 얼싸안았다. 아버님은 손을 내저었지만, 귀여운 할아버지처럼 웃고 있었다. “아버님도”하고 팔을 뻗어 벌리자 못 이긴듯 팔을 열어주었다.
나는 그렇게 의식적인 절차를 치르며 결혼을 ‘허락’ 받았다. 이후 대화중에 그이가 따뜻한 눈길로 내게 말한 적이 있다. “그때 말이야. 책임지고 행복하게 살겠다고 했을 때.. 진짜 든든하더라.” 그래, 내가 이 남자를 책임지고 행복하게 해주리라.
20A년 9월 ‘아드님을 주십시오.’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