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을게

by 포 청천






도청에서 100인 토론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나는 테이블 퍼실리테이터로 나와주기를 제안 받았다. 나는 프리랜서 강사였고 출산과 육아로 일을 줄인 상태였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고 그이가 아이를 봐줄 수 있으므로 승낙 했다. 무엇보다 내가 나가고 싶었다. 내 손으로 돈 버는 기능을 하고 싶었고, 바깥공기를 맡고 인간들과 대화하고 싶었다.


문제는 그 전주 토요일에 내가 그이를 떠밀어서 치과에 갔고, 때문에 내가 일하러 나가야하는 토요일에 실밥을 풀어야했다. 치과는 9:30에 문을 열었고 나는 10:00까지 도청에 도착해야했다. 그이에게 아기를 유아차에 태우고 치과를 다녀와주기를 청했다. 그이는 아기를 재우고 잠깐 나갔다가 오면 된다고 말했다. 아기를 혼자 두고 나갔다오겠다니 도무지 그 발상이 이해가지 않았다. 그럼 내가 테이블 셋팅 시간에 늦더라도(이런 아줌마 정말 싫다) 유아차 끌고 치과에 같이 가줄테니 치료한 후 데리고 집에 와달라고 했다. 그이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속이 터졌다.


아무리 재우고 나간다고 해도 아기가 혼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를 나열했다. 지금 아기는 뒤집기를 하는 시기라서 혼자 뒤집고 코 박고 울 수 있다. 아기는 식도 부근의 근육이 약해서 잘 게워내는데 삼키는 것도 잘 못한다. 누워 있는 상태에서 먹은 것 역류하면 기도로 들어가지 않게 세워줘야 한다. 그리고, 그리고... 그이가 힘을 눌러 담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일을 하거나 걱정을 하거나 둘 중에 하나만 해”

아니 씨, 말들이 입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서 입술이 달싹거렸다.


내 안에 부드러운 번역자가 말했다. 그이의 말은 ‘나한테 맡겨. 걱정하지마. 잘 다녀와.’라는 자상한 뜻이라고. 그러자 내 안에 엄격한 번역자가 반발했다. 저 말은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자초한 거야!’라는 뜻이라고. 나는 얼굴을 움켜쥐었다. 내 안에 낱말 분석가가 말했다. ‘일을 하러 나가니까, 걱정을 하는거지. 이 둘이 인과관계인데 원인과 결과 중에 어떻게 하나만 하라는 거야!!!!’


내 안에 별것들이 날뛰어도 내뱉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맡기기로 했으면 입대지 않아야한다. 그렇다. 입을 꾹 닫았다.





나는 뭐가 그렇게 무서울까? ‘사랑하는 아기가 죽을까봐 무섭다’는 것은 일차원적인 대답이다. 조금 더 솔직 하자면 아기를 죽게 했다고 자책하고 살아갈, 내 나머지 인생이 무섭다. 그 숨 막히는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죽는다고 하더라고 사고가 발생했을 때 업고 뛰기라고 해야 내가 살아가는데 위로가 될 것 같다. 그게 무서워서 곁에 있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기의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면 벌레 충자를 쓰고, 대수롭지 않게 구는 쿨병 걸린 말들이 언짢다. 본인들은 다 지나간 일이라고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대충을 제안하는 사람들의 말 소리가 귓가에 왱왱거린다. 사람이 쉽게 안 죽는다며, 상상력 키우지 말라고 한다. 평균을 내면 그렇겠지. 그런데 나는 세상에 하나고, 아기도 세상에 하나다. 평균에 집어넣을 일이 아니다. 애들은 다치면서 크는 거라고 예민하게 굴지 말라고 한다. 세상 나온지 170여일 됐다. 다치는건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


나는 사고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사고는 예상에서 벗어난 일로부터 닥치는 것이다. 죽음을 포함하여 사고는 내가 온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그저 사고가 났을 때, 내가 대처하는 노력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게 내가 아기에게 가져야하는 책임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죽고 다치는 것은 극단적인 일이다. 사실 일상적으로 더 애써주고 싶은 것은 트라우마를 최소화 하는 일이다. 그이가 아기를 두고 나갔다오겠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이랬다. ‘액자가 떨어지고, 파편이 튀고, 아기는 놀라서 울고, 20여분을 아프다고 힘들다고 소리쳐도, 세상은 깜깜하고 차갑고 혼자인 아기’ 그런 이미지였다. 아기가 자는 곳에는 액자가 없다. 여기서 이미지로 형상화된 액자는, 내가 예측하지 못한 일을 뜻한다.


어떤 외부의 큰 소리에 깜짝 놀라거나 자신의 몸에서 이상한 반응이 일어난다면 아기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매번 두려움에 몸서리쳐야 할지도 모른다. 아기는 스스로 괜찮다고 다독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양육자는 '마음의 소리'를 만들어주는 존재다.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하는 양육자의 목소리와 행동이 아기에게 내재화되면, 아기가 독립체가 되었을 때 직접 꺼내 쓸수 있을 것이다.





그이는 아기를 재우고 치과에 다녀왔다. 보란듯이 아무일도 생기지 않았다. 나만 전전긍긍이다. 그런데 제일 전전긍긍하는 내가 사고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아기가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 안일하게 소파에 뒀다가 떨어지게 한 사람 그게 나다. 무릎에 눕혀놨다가 바닥에 박치기하게 만들어서 혹 나게 한 사람 그게 나다. 과연 내가 곁에 있는게 아기한테 도움이 되는건지. 울고싶다.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아기야. 곁에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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