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조금 칭얼거렸다고 팔을 세게 잡아 데려간다. 아이는 휘청거리며 이끌려가더니 이내 자신의 팔을 잡고 아프다고 통곡하며 운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아이와 어른의 육체가 다른데 자신의 감정에 따라 힘을 쓰다니. 카페 옆 테이블에 엄마들이 모여 있다. 어른들이 수다를 떠는 동안 따라온 아이는 폰으로 동영상을 보고 있다. 먼저 드는 생각은 아이가 불쌍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사례들을 대할 때 나는 그녀들의 욕구 뒷전에 두었다. 가정의 행복, 아이의 욕구를 우선시하여, 엄마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었다. 따로 정의한 적은 없지만 엄마는 당연히도, 아이의 다양한 욕구를 수용 하고, 자신의 감정은 미뤄두고 먼저 일관되게 행동해야 한다고. 자신의 욕구보다 아이가 건전한 환경에 있을 수 있도록 보살펴야 한다고 전제했던 것 같다. 이런 전제라면 엄마라는 사람이 짊어져야할 억제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몰랐다.
억제의 무게가 이제 나를 질식사시키려 한다.
요즘 아기의 이유식 먹이기가 힘에 부친다. 숟가락으로 한 입 먹이면 아기는 ‘푸투투’하고 뱉아버린다. 음식물은 바닥을 포함해 사방에 튄다. 아기는 입에 손을 넣어서 음식물을 꺼낸다. 그리고 조물조물 만지고 자기 옷이며 내 옷이며 식탁이며 바른다. 아니면 음식물이 담긴 숟가락을 뺏아가서 저 멀리 던져버린다. 한번 먹이면 한번 행동을 한다.
죽의 질감이라 잘 닦이지 않고 짓이겨진다. 찾지 못한 사방에 튄 음식물은 어디선가 썩어 큼큼한 냄새를 일으킬 것 같다. 밥 한번 먹이는데 씻기고 옷 갈아입히기고 빨래하고 치우기까지 하면 심각하게 고되다. 그거 안 해보겠다고 계속 닦으면서 애쓰는 것도 고되다. 그렇다고 손발 묶어놓고 먹일 수도 없다. 먹다가 똥도 싼다. 이유식 시작한 뒤로는 어른 똥냄새랑 똑같다. 중증의 치매노인 같다. 하루 세 번 어김없이 열이 받는다. 도대체 몇 번을 열 받아야 끝나는지 모르겠다.
‘안 돼’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을 책에서 보고, 몇 가지 행동을 교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안 돼’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동의 교정이 가능하다는 말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안 돼’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만 안다는 뜻이었다. 단지 그 뜻이었다. 모르는 줄 알고 박박 우기면서 알려줬다. 덕분에 속을 활활 태웠다.
“푸투투”
“안 돼! 음식으로 장난치는 것 아냐”
“푸투투”
“안 돼. 음식은 삼키는 거야”
“푸푸푸”
“안 돼!”
“푸투투”
“안 돼!!”
“푸투투투투투!”
“안 돼!! 안 된다고!!”
“푸우투투우우 으앵......”
“....”
“히잉... 푸투투투우!!!”
“하아................................................ 우리 헤어지자”
다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속이 타서 잿가루 냄새가 났다. 너무 견딜 수 없어서 장난 아니고 진심으로 할 수만 있다면 헤어지고 싶었다. 이런 일방적인 사랑에 신물이 났다. 헤어지자고 했는데 그 와중에도 나는 얘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견딜 수 없어서 헤어지자고 했는데 견딜 수 없는 것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이 숨 막혔다. 창문 없는 독방에 갇힌 기분이었다. 찌그러진 마음으로 엎드려서 바닥을 닦았다. 그리고 반도 안 먹은 이유식 그릇을 봤다. 미치겠다. 굶든 말든 다른 방으로 혼자 도주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을 달랠 새도 없이 먹여야했고 같이 있어야했다. ‘푸투투’. 얼굴보기 싫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푸투투투투’ 안아달라고 보채는데 너무 미웠다.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것을 겨우 억눌렀다. 그런데 또 한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4시간 후에 또 해야 한다. 아직도 먹여야하고 내일도 먹여야하고 집은 난장판이고 마음은 쑥대밭이다.
‘엄마’ 그게 뭐 그렇게 힘들다고.
다섯 살 아들이 있는 친구와 만났다. 친구는 어제 아들과 싸우다가 울었단다. 왜 싸웠냐고 물어보니 아이가 잘 시간이 한참 넘었는데 안 자려고 했단다. 이렇게 해봐도 저렇게 해봐도 안 되서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냐며 나한테 왜그러냐며 울었단다.
이야기를 다 들었다. 그런데 친구의 이야기임에도, 내가 엄마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그게 울만한 일인지 빠른 공감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랬구나 마음이 안 좋았구나’ 정도의 얕은 공감에 그쳤다. 친구가 아니라면 아이한테 더 이입될지도 모른다. 내 일 아니라고 아주 쉽게 내뱉아 버릴지도 모른다. ‘안 자려고 하면 좀 놀아주면 안 되나?’, ‘자는 시간이라고 말해주고 침대에 눕히고 방을 나오면 안 되나?’, ‘애가 안 자려고 하는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 아이의 입장에만 입각한 쉬운 생각 말이다.
우리 모두는 아이였다. 우리 모두는 엄마에게 결핍을 느껴봤던 아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도 특정 아이의 엄마가 되어 보는 경험을 할 수 없다. 먼발치에서 바라볼 때는 늘 엄마가 아닌 아이에게 우리 자신을 이입한다.
'엄마' 힘들 것은 안중에도 없는(지금도 여전히) 내가 '엄마'로 살고 있다. 내 기준에서 '엄마'를 잘 수행하려면 자신의 욕구보다 자식의 욕구에 귀기울여야한다. 그런데 맞긴하잖아. 아직 내가 키우고 있는 것은 사람이라기보다 아기다.
아기를 계획했을 때만해도 아기에게 기울어질 내 인생의 밸런스를 쉽게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닥쳐보니 자아가 비대한 내가 '나'를 없애면 잘 할 수 있는 이 역할을 잘 해내기 힘들다. 내 이름이 아니라 '영희엄마', '철수엄마'라고 불리는 것은 실제 변형된 자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아기를 갖는 것인줄 알았다. 아니다. 이 일은 아기에게 엄마를 갖게 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