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교과서 왈,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

by 포 청천








조리원에서 만났던 아기 엄마들에게 물었다.

“아기가 태어나서 좋은 점이 뭐야?”

“음............ 양가 부모님들이 웃을 일이 많아진 거요.”

“맞아요.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아니 나한테 좋은점 말이야.”

......... (일동침묵)


“제발 알려줘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음................. 힘든데 진짜 힘든데 예쁘기도 하고 크는게 신기해요. 그런게 재밌을..걸요?”

“난 얘 아니었어도 재밌게 살았을 텐데?”

......... (일동침묵)





스스로에게 왜 아이를 계획했냐고 물었다. ‘할까 말까, 할 때 넌 하는 쪽이잖아’라고 답했다. 대답이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역시 시원하지 않은 대답들이었다. 나는 사회가 무의식 속에 각인시킨 ‘일반’적인 삶의 형태에 세뇌 당한 걸까? 일부는 맞다고 생각한다. 사회라는 놈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아이를 생산하고 양육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인식을 심었다. 어떤이는 사회적 분위기만으로도 선택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성격이 모나서, 둥글게 남들 하는 대로 선택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회적 영향을 받았겠지만 분명히 나는 내가 선택했다고 본다.


문제는 내가 선택해 놓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선택했으니 어디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했다. 그런데 왜 나는 사서 고생을 하기로 했고 왜 나는 현재 불행하냐고. 육아는 정말 적성에 맞지 않는다. 아니 육아가 적성이 맞는 사람이 있을까? 육아라고 쓰고 뒷바라지라고 묵음으로 읽어야 하는데. 나는 왜 이 삶을 택한 걸까?





어떤 선택은 분석 후에, 어떤 선택은 직관 후에 내려진다. '아이'라는 문제는 직관을 거쳤다. 분석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직접 출산과 육아를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분석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순간 아이가 있는 가정이 나에게 어울리겠다고 확정했다. 나를 위한 선택을 할 때는 직관적 선택이 적중률이 높다.


그런데 지금 나는 왜, 행 보다는 불행 쪽에 기울어진 삶을 살고 있을까? 나는 삶을 재미있게 만드는데 소질이 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고부터 잘 안 된다. 내 선택에 책임을 지고 싶은데 아니 책임은 지고 있는데 책임만 지고 있다.





그렇다면, 시간을 돌려 돌아간다면 아이를 낳지 않겠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런데 또 그 질문에는 아니, 아이를 낳겠다고 답할 것이다. 나는 출산의 고통을 안다.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제발 그만하게 해달라고 울부짖겠지. 나는 어떤 우울증이 오는지 안다. 내 몸이 얼마나 엉망이 되는지 안다. 내 커리어의 기회가 얼마나 축소되는지, 육아가 얼마나 재미없고 나와 맞지 않는지 안다. 나는 매분 시계를 보며 욕할 것이고, 상상도 못한 것들을 빼앗기며, 내가 잃는 것들에 대해 분노 할 것이다. 그 과정 다시 겪는다고 해도, 놀랍게도 나는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 할 것이다. 도대체 왜?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배우지 않았나? 왜 나는 엉터리 선택을 반복하려는 거지?





나는 한동안 이 모순에 대해 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누가 부처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들었다. '생(生)은 고(苦)'. 어떤 의미, 어떤 상황에서 부처가 그런 말을 남겼는지 모른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마음대로 해석하고 적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부처의 말을 내 식대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잘못된 전제였다.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주입식 교육에서 얻게된 전제 말이다. 나는 행복하려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아니다. 힘들 수도 있지만 그 삶을 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나는 불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물론 이만큼이나 허덕일 줄은 몰랐다...)


그렇다. 나는 지금 조금 불행하다. 그래도 괜찮다. 정정, 조금 괜찮다. 삶이 늘 행복할 수는 없다. 아이를 낳기로 선택 했을 때, 그때 나의 직관은 나를 위한 선택을 했다. 나를 위한다는 말이 나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말과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 선택은 감정보다 가치에 비중을 둔 선택이었다.


여기서 가치란 사회에 이바지 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나는 풍요로운 색을 가진 사람이고 싶다. 그 가치에 부합하는 결정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성장을 돕고 지켜보는 일은, 내게 통찰을 주며 뜻깊은 일이다. 직관적 선택의 분석이 끝난 지금, 이제야 온전히 내 선택을 받아들였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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