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
계획보다 실행을 중시하는 일부 스타트업의 문화는, 반대로 느리고 절차가 많아 비효율적이라 느껴지는 대기업의 프로세스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경이롭다는 수준의 속도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런 문화에서 상당 기간 사람들은 ‘일 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몇 달 지나지 않아 알게 된다. 우리는 빠르게 움직이긴 했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문제는 실행 속도가 아니다. 팀은 주 단위로 기획을 바꿨고, 신규 기능은 끊임없이 릴리즈됐다. 하지만 제품의 성장은 멈춰 있었다.
KPI는 매번 재설정됐고, 실패는 “생각보다 시장 반응이 안 좋아서” 라는 말로 무마됐다.
무엇보다 이런 경우 팀은 점점 지쳐간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가 있는 기업에도 미션과 비전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기업의 대표가 말하는 “미션, 비전”은 그저 구호에 그치지 않는다. 추상적인 말은 슬로건으론 괜찮지만, 제품 전략으로는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다.
아마도 회의 중에도, 문서에도, 인터뷰에서도 미션, 비전, 방향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을 것이다. 미션, 비전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성원에게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이런 문제는 단지 대표자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로부터 혹은 대표자를 통해 명확한 미션과 비전이 정리되었는지 여부를 떠나 대부분의 회사는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제품 관리자는 회사가 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나름의 미션과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한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무전략 상태에 제품 관리자들도 동일하게 무감각해져 있다는 점이다. 대표가 방향 없이 일을 지시하면 그대로 기획했고, 새로운 기능이 실패하면 “원인을 나중에 찾아보자”며 넘어갔고, 어떤 고객을 위한 제품인지 묻는 질문은 거의 사라졌다.
문제가 생겨도, 기능만 고쳤다. 제품 관리자는 문제를 정의하지 않았고, 조직은 그들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미션과 비전은 실무자에게도 필요하다.
PM/PO에게 미션과 비전은 선택적인 게 아니다. 그건 전략이 아니라 실행의 기준점이다. 우리가 어떤 고객을 위해 일하는가? 어떤 세계를 만들고 싶은가? 우리 제품의 성공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의사결정도 ‘정당화’할 수 없다. 단지 그때그때 시급한 일만 처리할 뿐이다.
미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가를 바탕으로 Product Owner와 단순 기능을 기획하는 사람을 구분한다.
아마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감을 가질 수 있다. 미션, 비전 따위는 없어도 그만 아닌가, 그걸 회사가 정해야지 왜 내가 정하느냐고 말이다. 로드맵, 분기, 반기 단위의 명확한 계획을 도출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조직도 있다. 하지만 명확한 미션과 비전 없이는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러한 껍데기는 단지 만들고 싶은 기능들의 나열일 뿐이다.
왜 많은 대표나 제품 관리자가 비전을 말하지 않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많은 경우, 비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미션, 비전은 공유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대표가 가슴에만 품고 있는 미션과 비전은 구성원의 실행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리고 그 미션과 비전이 팀과 맞닿을 때, 비로소 제품은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미션과 비전이 무엇인지는 이전에 집필한 책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룬 바 있다. 다만 헷갈려서는 안 되는 것이 미션과 비전을 반대로 생각하는 경우이다. 미션은 궁극적으로 달성해야 할 것이자 조직의 근본적인 존재의 이유다. 반면 비전은 그 근본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 가는 단기적인 계획에 가깝다. 그래서 미션은 상당기간 혹은 기업이 존재하는 기간 내내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전은 매년 혹은 상황에 따라 자주 바뀔 수 있다.
매년 비전 선포식을 하는 것만 보더라도 기업의 존재 이유는 분명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올해 무엇을 집중할지 선언하는 행위에 가깝다. 반대로 생각해도 좋다. 그저 충분히 공유하고 그 방향대로 나아가는지 끊임없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