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의 잔기술
눈치도 한계가 있기 마련
눈치가 본능이고 일정 부분 예의라지만 항상 참고만 살 수 없다. 때에 따라서는 심적으로 고갈될 때가 있고 소위 빡치는 순간이 온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는 순간, 이 눈치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내 원래 성격을 있는 그대로 발휘하고 싶어 진다. 결국, 눈치 보는 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순간 내가 정말 눈치를 보지 말고 내 본능을 드러내도 될까 고민이 든다.
눈치를 순간적으로 벗어던지고 싶은 순간
눈치를 벗어던지고 싶은 시기는 내가 상대방에게 무시를 당하고 있다고 느낄 때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아는 것처럼 나의 친절 또는 나의 예의, 나의 눈치 보는 행동에 대해 존중받지 못하면 화가 치민다. 나 스스로가 상대방에게 호구 잡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자존심이 팍 상한다. 나의 눈치로 인해 나의 자존감이 점점 하한가를 찍는 순간 나는 이제는 눈치를 벗어던지고 싶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
눈치라는 가면을 벗어던진다는 건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거다. 그게 내 감정일 수도 있고 생각일 수도 있고 가치관일 수도 있고 숨겨왔던 포부일 수도 있다. 이때까지는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며 적절히 감추며 죽여왔던 자신을 보여줘야 한다. 즉 내 마음대로 하는 거다. “이러시면 안 된다.”라고 점잖게 타이를 수도 있고 순간 버럭 화를 낼 수도 있다. 그간 몇 번을 낼까 고민했던 사표를 사장에게 던지고 나오면서 나를 괴롭혔던 상사에게 “애쓰세요.”라고 한마디 날리며 어깨를 툭툭 쳐줄 수도 있다. 생각만 해도 통쾌한 일이다.
너 감당할 수 있겠니?
그렇지만 나의 충동적인 행동에는 항상 책임과 결과가 따른다. 마음 깊은 곳 막혀있던 체증이 한순간 씻겨 내려가는 후련함을 느낄 수 있지만, 그 기분도 잠깐이고 본능처럼 불안이 스멀스멀 밀려 들어온다. 나의 눈치는 결국 나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행동인지라 그 생존기술을 해제하는 순간 다가올 생존의 위기를 책임져야 한다. 눈치를 벗어던지며 가슴속 사이다를 만끽했지만 그 이후의 상황에 나는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 고민이 없이 무작정 눈치의 가면을 벗었다가는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된다.
지금은 일단 기다려라
대학병원을 나올 시점의 일이다. 나름 병원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왔는데 나름 억울한 일이 있었다. 나는 눈치를 보는 사람인 지라 그 상황에서도 혹여 내가 무언가 잘못을 하지 않았는지 걱정을 했다. 내가 잘못된 결정을 해서 병원에 누를 끼친 건 아닌지 걱정했다. 이런 나 자신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본능이다. 그리고는 주변 선생님들에게 확인했다. 그제야 내가 처한 상황이 억울하다는 걸,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러자 내가 존중받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무시당했다는 것에 대해, 호구 취급당했다는 것에 대해, 버려졌다는 것에 대해 분노가 올라왔다. 구겨진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 내 눈치의 가면을 벗고 당당하게 행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날 뿐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던 때, 평소 나를 아껴주시는 교수님께 연락이 왔다. 내 사정을 들었다고 하시고는 딱 한 마디만 하셨다. “지금은 일단 기다려라.” 참으라는 것도 아니고 버티라는 것도 아니고 힘내라는 것도 아니고 기다려라.
숨 고르기의 필요성
그때 교수님의 한마디가 나의 무모한 행동을 막았다. 충동적으로 눈치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을 때, 설령 나중에 가면을 벗어던지더라도 그 순간은 멈춰 서야 한다. 일종의 숨 고르기가 필요한 셈이다. 내가 이 가면을 정말 벗어도 되는지, 그 순간이 지금이어야 하는지, 어떤 과정으로 벗어야 하는지. 일련의 고민 없이 벗어던졌다가는 화롯불에 뛰어드는 불나방 신세가 되기에 십상이다. 눈치의 가면을 쓰기 위해서도 기술이 필요하지만 벗기 위해서도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흥분한 가슴을 가라앉히고 냉철하게 자신의 상황을 돌아봐야 한다.
진정 벗어던져야 하는 순간 필요한 요소
숨을 고르며 기다린다고 해서 무조건 참고 버티라는 건 아니다. 기다리며 내가 지금 눈치를 벗어던져도 될지 내가 가진 요소를 검토한다. 내가 정말 이후의 상황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점검한다. 적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아는 것이 눈치 싸움에서는 중요하다. 눈치를 벗어던지면 생길 일들은 눈치를 보는 이유의 반대 상황이다. 먹고 살기 어려워질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내 영역을 휘젓고 다닐 수도 있다. 또는 사회적 안전망에서의 불안이 엄습해 올 수 있다. 내가 그런 악조건을 버텨낼 수 있는지 준비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1) 경제적 여력
돈은 내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버틸 수 있는 일차적인 요소다. 아무리 내 멘탈이 갑이라도 당장 의식주에 문제가 생기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하려면 적어도 몇 개월은 경제적으로 버틸 여력이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마치 전쟁을 하기 위해 병참이 제대로 갖춰져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장 의식주의 문제를 버틸 수 없다면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지금은 가면을 벗을 타이밍이 아니다. 일단 버텨야 한다.
2) 전문성
여기서 전문성은 직업적 전문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나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강점이다. 물론 직업적 전문성도 포함되지만, 그 밖에도 가족이나 직장 내에서의 역할과 믿을 수 있는 인간성까지도 포함된다.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지금 눈치를 벗어던지더라도 주변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이 필요하다. “이건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정도의 전적인 믿음이면 더 좋다. 자신이 어떤 조직, 집단 내에서 대체 불가한 사람이 된다는 건 눈치를 벗어던지기 위한 여러 이차적인 상황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된다. 이 힘이 있으면 주변에서 내가 눈치를 벗어던진 상황을 먼저 이해해 주려 한다. 적어도 얕잡아보지는 않는다. 내가 눈치를 벗으려 할 때 존중받을 것 같지 않고 무시당할 것 같은 상황이라면 아직은 때가 아니다.
3) 지지체계
눈치를 벗어던지고 난 후 나는 불안에 그대로 노출된다. 먹고살기 위한 불안이든, 사람 간의 관계 불안이든,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이든, 불안이라는 사막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거센 모래바람을 그대로 받아 견뎌야 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내가 느끼는 심리적 상태는 고립되어 외로운 자신이다. 그 감정을 견뎌내려면 나 혼자만으로는 버겁다. 혼자인 상태는 불안을 더 키우고 생각은 부정적으로 흐르면서 자존감은 더 낮아진다. 실제 현실은 그렇게 나쁘지 않음에도 스스로 인식하는 자신의 상태는 최악이라고 왜곡해 판단한다. 나 혼자 남아 있는 것이 생각을 왜곡시키는 거다. 그래서 눈치를 벗어던진 이후에는 혼자 있지 않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변의 지지와 격려, 위로, 응원은 생각이 중립을 찾도록 해 주고 떨어지는 자존감을 지탱해 준다. 불안은 점점 줄어들고 새롭게 눈치의 기술을 쓸 힘을 공급해 준다. 나를 긍정적으로 지켜봐 주는 사람이 없는 상태로 눈치를 벗어던졌다가는 처절한 고독에 무너질 수 있다.
벗어던졌다면 다음은 어떻게 수습할지
눈치를 벗어던질 때 위의 세 가지 요건을 다 갖추어야 하는 건 아니다. 물론 다 갖추고 있다면 베스트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중 하나라도 든든하다면 눈치를 벗어던질 최소한의 기반은 된다. 이런 기반은 이후의 수습과정을 위해 필요한 거다. 눈치를 벗어던지는 내 행동에는 결과와 책임이 뒤따른다. 기반이 있어야 결과와 책임의 상황을 지탱하고 버텨나가고 해결할 수 있다. 눈치를 벗는 기술보다 중요한 건 이후의 상황을 수습해 내는 기술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수 있고, 신뢰를 잃을 수도 있고, 관계가 깨어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수습해 내는 과정이 한편으로는 나를 보다 성숙하게 만든다. 일종의 경험치인 셈이다.
경험치의 중요성
계속 눈치만 보면서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보지만 또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벗어던진다. 어릴 때는 열정으로, 꿈으로, 혈기로 눈치를 벗는다. 당연히 사태를 수습할 기반도, 능력도, 경험도 없기에 상황은 꼬이기 일쑤다. 그러면 또 눈치를 보며 이를 물고 버텨내야 한다. 그런 과정을 겪다 보면 경험치가 쌓이고 경제적인 여력도, 내 전문성도, 지지체계도 조금씩 탄탄해져 간다. 세상에 공짜가 없는 것처럼 경험에는 꽝도 없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간을 가지고 임계점까지 버텨내는 힘이 진정 눈치를 벗어던질 힘을 만든다. 눈치는 쓰는데도, 벗는대도 내공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