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 암 환자를 만나다.
유방암 치료를 받은 A 씨는 수술 및 항암치료 등 기본적인 암 치료를 마쳤고 검사상 암이 발견되지 않는 관해 상태임에도 계속해서 치료를 받고 있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암 종양이 조직검사에 여성호르몬(에스트로겐) 수용체 양성반응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야기인즉슨 암 조직이 여성호르몬에 의해 자극이 되어 자라기 때문에,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내 몸 안에 여성호르몬이 작용하는 것을 방해하는 타목시펜이라는 약을 계속 먹으며 호르몬 치료를 받아야 한단다. 타목시펜을 계속 먹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기존의 항암 화학요법에 비하면 훨씬 낫지만, 아직은 여성호르몬이 필요한 내 몸에서 여성호르몬을 없애는 셈이니 젊은 나이임에도 갱년기 증상이 생긴다. 몸 곳곳이 쑤시고 얼굴을 화끈거리고 속은 답답하고 밤에 잠도 잘 안 온다. 피부도 예전 같지 않고 괜히 피곤하다. 치료를 다 받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 약을 먹는 동안에는 계속 암이라는 걸 신경 쓰고 사는 것 같다. 그런데 몇 년 전 병원 선생님으로부터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5년간 받으면 된다고 했던 타목시펜 치료를 총 10년간 받아야 한다고 말이다.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5년이 아니라 10년 동안 썼을 때 재발에 대한 예방 효과가 더 높다고 밝혀졌단다. 그러더니 최근에는 15년을 받아야 효과가 좋다는 기사도 났다. 힘든 수술과 항암 화학요법을 마쳤을 때는 이제 암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이미 수년째 암이 없는 상태이지만 여전히 암을 관리하면서 살고 있다.
암을 급성기 질환으로 봐야 할지, 만성기 질환으로 봐야 할지에 대해 일종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암은 치료 아니면 재발이었고, 치료가 안되거나 단기간에 재발한다는 건 곧 불치의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그렇기에 의료진 입장에서는 다른 건 제쳐 놓고 치료에 매달릴 수밖에 없기는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진행된 암이나 일부 치료가 힘든 암의 경우에는 여전히 급성기 상태로 당장의 암 치료에 집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그래도 상당수의 암은 기본적인 암 치료 이후 관해 상태에서 암 재발을 예방하기 위한 관리를 이어가거나 암 조직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도 항암치료를 반복하면서 암이 더 악화되는 걸 관리하기도 합니다. 최근 발표된 국내 암 통계에서 5년 이상 암 생존율이 70%를 넘어서고, 표적치료 및 면역치료 등의 발전은 설령 암이 진행되거나 전이된 상태에서도 장기적으로 암을 치료하면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게끔 바꿔 놓았습니다. 암은 급성기 질환에서 만성기 질환으로, 집중치료에서 관리로 암 진료의 관점이 변하고 있습니다.
미 행정부는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암 정복을 위한 선언을 해 왔습니다.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을 성공시킨 이후 과학적 성과에 자신감을 얻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71년 불치병을 정복하는데 집중하겠다며 암과의 전쟁을 선언하죠. 이때부터 미국에서는 뭔가를 정복하기 위한 인간의 끈질긴 노력과 성취를 달착륙에 비유해 'Moonshot'이라는 용어를 쓰게 됩니다. 물론 당시 종양학 전문가들은 닉슨의 이러한 선언을 시기상죠라고 봤습니다. 암과의 전쟁은 이후 미국 행정부에서 꾸준하게 이어졌습니다. 특히 인간의 유전체 정보 전체를 지도로 만들기 위한 인간 지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가 1990년에 시작하면서 인간의 유전자 정보를 통해 노화와 암 등 불치병이 극복될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놈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진행했던 빌 클린턴 대통령 시기와 프로젝트를 2003년에 완성한 조지 부시 대통령 시기에는 인류가 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첫 세대가 될 거라 자신 있게 선포했죠.
물론 이 시기의 의학의 발전은 암 치료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복합 항암 화학요법을 위한 여러 임상연구를 통해 항암 화학요법이 발전하며 진행암에 대한 관해율을 높였고, 암 발생과 관련된 여러 유전자를 확인하면서 암이 발생할 수 있는 고위험군을 찾아내 조기 치료 및 선재적 치료를 가능하게 하고, 호르몬 치료나 면역치료 및 표적치료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죠. 그렇지만 여전히 암은 정복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정복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치 인간 지놈 프로젝트가 완성되고 난 이후 대부분의 질병과 노화가 극복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요. 우리는 여전히 늙고 병들고 언젠가 자연스레 죽음을 마주합니다.
미 행정부의 암 정복에 대한 관점은 오바마 대통령 시기부터 조금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그 관점은 현재 바이든 대통령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암 관련 정책을 달착륙 계획에 비유해 'Moonshot'이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쓰고 있지만 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겠다거나 암을 정복하겠다는 표현을 쓰지는 않죠. 대신 우리가 그간 알고 있던 암을 종식(End)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바이든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하면서 암과 관련된 Moonshot 계획을 주도했기에 그 정책의 방향이 이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트럼프 시절의 암 정책은 아래 링크 하나로 대신하겠습니다.)
2022년 초 바이든 대통령이 발표한 암과 관련된 선언을 보면 2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25년 내 암으로 인한 사망률을 50%까지 줄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암을 경험한 사람이나 그 가족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입니다. 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것과는 다소 느낌이 다르죠. 결국 이번 Cancer Moonshot 발표는 암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잘 관리하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암의 조기검진, 예방, 환경개선, 의료격차 해소, 적합한 치료 제공, 소아암 등 희귀 암 지원, 암 경험자 및 돌봄 가족에 대한 지원 등을 주된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물론 치료법에 있어서도 코로나 백신에서 사용된 mRNA 치료기술을 암에도 적용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획기적인 치료법의 개발을 통해 기존의 암 상황을 종식시키기보다는 암의 발생을 줄이고 빠른 시기에 적합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저소득층 등 의료 소외계층에서도 표준적인 암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보완하면서 전반적인 암 치료의 성과를 높이고자 하는 거죠. 더욱이 암 경험자(환자 및 보호자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 치료시기든 치료 이후든 일상생활 회복 및 삶의 의미와 가치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정신종양학적 접근도 중요하게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국 이야기만 하기가 좀 그래서, 우리나라 이야기도 해야겠죠. 우리나라의 암 관련 정책도 미국의 정책의 과정과 유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정리를 하면서 보니 더 그렇게 느껴지네요. 우리나라에서는 명칭에서도 적나라하게 '암정복 10개년 계획'으로 암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제1기 암정복 10개년 계획은 1996년부터 2005년까지 암 치료 기술 및 기반을 마련하고 주요 암의 조기검진 사업을 통해 암 치료율을 높이려 했습니다. 제2기 암정복 10개년 계획은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시행되었고 암 치료뿐 아니라 암 예방과 재활, 호스피스 등 보다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었죠. 미국처럼 이 시기만 하더라도 암을 정복할 수 있는 질병으로 봤습니다. 그러던 관점은 제3기부터 바뀌게 되는데 명칭도 암정복에서 '암관리 종합계획'으로 바뀌게 됩니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지속된 제3기 암관리 종합계획에는 조기검진과 완화치료와 더불어 진단 및 치료, 암 생존자(암 경험자) 지원에 대한 내용이 추가되면서 정신종양학적 접근의 중요성이 포함되었습니다. 암생존자통합지지사업도 이때부터 시작되죠. 그리고 2021년부터 시작된 제4기 암관리 종합계획에는 암 예방 및 검진의 고도와, 암 치료 및 대응의 내실화로 기존의 암 관리 정책을 튼실히 하면서, 전국 어디서나 모든 국민이 암에 대해 적절하게 치료받고 관리받을 수 있도록 균등한 암 관리 기반 구축이라는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결국 우리나라의 암 관련 정책의 방향도 암을 예방하고 조기에 발견해서 적기에 적절한 치료를 누구나 받을 수 있으면서 암 치료 과정 및 이후에도 스스로의 삶의 가치를 지속해 갈 수 있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면서 글이 지저분해질까 봐 염려스럽지만, 정신과 의사 입장에서 암 과는 별개로 이 주제와 관련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암과 유사하게 정신질환에서도 약물치료를 통해 질병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실 정신의학처럼 치료법이 급격하게 변화한 의학영역도 없을 겁니다. 아주 초창기에는 마치 무속신앙 같은 치료가 횡횡했다면, 말도 안 되는 고문과도 같은 치료법이 행해지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도심 외곽에 사회적으로 격리하고 수용을 하기도 했고 (불행히도 이건 최근까지도 지속되었죠.),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근현대에 들어서는 최면이나 정신분석과 같은 어찌 보면 비침습적이면서도 고상할지도 모를 치료법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정신의학은 약물치료가 중심이 되죠. 1950년대 조현병 등을 치료하기 위한 항정신병 약물의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클로르프로마진(Chlorpromazine)부터 1980년대 행복 알약(happy pill)이자 상품명 프로작(Prozac)으로 알려진 세로토닌계 항우울제 플루옥세틴(Fluoxetine)을 필두로 정신과 약물의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추가돼서 나오는 여러 새로운 정신과 약물을 통해 조현병, 양극성 장애(조울증), 강박증, 우울증, 공황장애 등 다양한 정신과 질환이 예전과 달리 극적으로 좋아지는 경우가 생기면서 약물로 정신질환 대부분이 극복될 거라는 환상이 생겼습니다. 물론 약에 의한 부작용도 있었고 약물치료에도 호전이 없는 치료저항성 (치료에 효과가 없는, 정확히는 약물치료 저항성) 정신질환이라는 개념도 생겼죠.
제가 정신과 레지던트를 시작한 2000년대 후반은 정신약물의 그야말로 전성기였습니다. 떠올려보면 정신과 의사로 첫 출근을 했을 때부터 당장 약을 처방하는 법부터 배웠죠. 특히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조만간 나올 신약에 대한 기대가 말 그대로 엄청났습니다. 특히 조현병 신약에 대한 기대가 컸죠. 그간의 개발된 조현병 약물이 치료 효과는 좋았지만 몸이 둔해지거나 살이 찌는 등의 이차적인 부작용이 심했거든요.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특정 조현병 약을 먹고 살이 찌면서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같은 질병이 발생했다고 제약회사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런 가운데 새로 나오는 약물은 효과는 비슷하거나 더 좋으면서 여타 기존의 부작용이 없는 획기적인 약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습니다. 아마 2010년 정도가 정신의학계 특히 정신약물과 관련된 영역에서는 최고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정신약물 관련 학회도 가장 활발했고 신약에 관한 임상실험 결과가 발표되고 저 역시 앞으로 정신과계에 획기적인 발전이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이후의 결과를 말씀드리자면, 아마 제 말투에서 이미 예상하셨겠지만, 제약회사나 정신과 의사의 장밋빛 예상은 처참하게까지는 아니지만 겨우 체면만 남길 정도로 깨졌습니다. 대부분의 신약이 부작용이 없으면 효과도 떨어지고, 효과가 있으려면 용량이 높아지면서 부작용이 비슷하게 발생했죠. 물론 일부 약물은 조현병이 아닌 양극성 장애나 우울증 영역으로 대상을 확장하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는 했습니다만, 어쨌든 정신약물로 정신질환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깨져버린 셈입니다.
물론 이런 의학의 실패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이런 실망 덕분에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서 정신의학에서 다시금 환자의 이야기를 더 깊이 듣고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으니까요. 정신분석적 정신치료나 인지행동치료, 명상 기반의 여러 치료법 등이 다시금 주목을 받고 발전했습니다. 중증 정신질환에 있어서는 조기 정신증을 빨리 발견해서 치료하고 진행된 조현병은 격리 수용 중심의 병원 치료를 벗어나 외래 치료를 중심으로 지역 사회에서의 관리로 전환하는 등 약물 치료 이외에 사회적으로 관리하는 접근법으로 치료의 중심이 이동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보면 분야는 다르긴 하지만 정신의학에서의 과정도 암에서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실수, 실패, 수정의 과정을 통해 의학은 발전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인류가 그렇게 발전하는 것이겠지요.